중국에서는 기원전 11세기경 주나라 건국이후 제후와 백성을 다스리는 군자의 덕목으로 "예"가 성립된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500년 동안 "예"의 나라라고 불리울 만큼 의례를 강조했다.
 서양에서는 나폴레옹 전쟁후 19세기 초에 특히 외교상의 의전관례와 기준에 관해 그 필요성이 강조됐다. "비엔나 회의" 이전까지는 약육강식의 시대로서 강대국이 외교의 주도권을 쥐고 외교 모임에서 상석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분쟁도 빈번했다.
 예컨대 17세기의 유럽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세력다툼이 심했는데, 이러한 싸움은 각국 수도에서 양국 대사의 싸움으로 나타났다.
 1661년 스웨던 대사가 영국에 부임해왔을 때의 일이다. 런던 주재 각국 대사관은 당시의 관행에 따라 신임대사를 영접하기 위해 런던항에 대표를 보냈다. 환영행사가 끝나고 시내에 들어오기 위해 각국 대사관 대표들이 행렬을 지었다. 이때 프랑스 사절이 재빨리 행렬의 제일 상위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을 본 스페인 대표는 40여명 무장호위병들을 시켜 프랑스 사절의 마차를 끄집어 내게 하고 그 자리를 스페인 대표가 차지했다. 이 때문에 마부들이 부상을 입는 등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크게 노해 급기야 스페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 사건이 난지 약 100년후 영국의 버킹검궁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상석을 놓고 러시아 대사와 프랑스 대사간에 격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러시아 대사가 부상을 입었다.
 이와 같이 외교에 있어서 의전상의 서열이 크게 문제가 됐다. 이 때문에 의전상의 원칙이 나폴레옹 전쟁후인 1815년에 열린 "비엔나회의"에서 처음으로 정해졌고 1961년에 체결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정에서 구체적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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