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변화로 안보인식 점차 둔해져
겉으로 포장한 안보위험세력 활개
국내 정세 안정될수록 안보 관심을

▲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언론보도에 의하면 최근의 간첩(間諜)사건은 예사롭지 않다. 얼마 전 ‘자주통일 충북 동지회’라는 명칭을 가진 간첩(일부에선 노동활동가라 칭한다) 일당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언론이 밝히는 그들의 활동은 매우 특이하다. 간첩의 사전적 의미는 한 국가나 단체의 기밀을 몰래 알아내어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숨어서 활동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그들은 합법적으로 보이는 조직을 만들고 공개적으로 버젓이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숨어서 암약(暗躍)한 것이 아니고 대놓고 활약(活躍)해온 것이다. 그들은 소위 ‘우리민족끼리 통일’이란 북한구호의 한국판인 ‘자주통일’이란 명패를 사용해왔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북한은 ‘우리끼리’라는 통일의 방법론을, 남한은 ‘자유평화통일’이란 통일의 내용적 지향점을 더욱 강조한다.

그들은 기밀입수·보고라는 전통적인 스파이 행위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겉으로는 노동활동을 위한 조직이라면서, 대통령선거캠프에서 특보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총선에도 출마했으며, 총선에서 특정야당을 참패시켜 그 당대표를 매장시키고,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F-35A스텔스 전투기 도입 예산을 삭감케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해왔다고 한다. 즉, 통상의 스파이활동보다 몇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 정치개입은 물론 실질적인 반국가행동까지 해왔다는 얘기다. 그들이 암약대신 활약을 택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국가안보 관련해서 비밀정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이제는 남남갈등 유발, 남한의 전투능력 약화라는 구체목표를 갖고 행동하는 쪽으로 전략을 변경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국민의 안보의식과 대북경각심이 약화되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약화하고 있음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고 나아가 그 정당성을 믿게 되는 법이다. ‘내가 하는 일은 절대로 죄가 아니요, 오히려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다’라고 착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기에 지금도 큰소리친다. ‘아니 북한자금을 좀 받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한국군의 전력을 다소 약화시키는 정도의 노력을 하는 것이 어떻게 나쁘다는 것인가? 남북한이 자주통일을 하려면 북한이 위협을 느끼지 않아야 하며, 그러려면 게임체인저급 전투기 도입도 좀 감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를 위해 정치인들 좀 만나고, 김정은에게 충성맹세 정도 한 게 무슨 잘못인가? 더욱 효과적으로 자주통일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통령선거캠프에 들어가 노동관련 활동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한 것이 도대체 왜 잘못이란 말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국민의 안보의식도 많이 변했다. ‘체제전쟁은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아니 이렇게 발전된 나라, 모든 것이 공개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어떻게 간첩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설사 좀 있으면 어떤가? 그렇다고 흔들릴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대통령선거캠프에 좀 들어가 특보노릇 좀 했다고 뭐 어떤가? 그까짓 나라 망할 일도 아닌데….’ 간첩 잡으면 사형(死刑) 등 중형이 내려지고, 간첩 잡는데 도움을 제공한 사람에겐 거액의 포상금이 주어지던 시절은 다 지나간 옛 얘기이다.

개인의 자유가 가장 존중되고, 모든 면에서 가장 개방되어 있으며, 안보적으로나 체제적으로도 가장 튼튼하다는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국방공무원은 물론, 모든 공무원은 미국 외의 다른 국가에 그 어떤 직무상의 정보를 제공해선 안 되며, 따라서 돈을 받아도 안 된다. 그 국가가 미국의 우방국(友邦國)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감시도 원거리에서 보이지 않게 강력히 작동한다. 외교관은 물론, 특파원, 유학생을 망라하여 그러하다. 백악관, 의회, CIA, 펜타곤 등 미국 주요국가기관이 밀집되어 있는 워싱턴DC 근처 크리스탈시티(Crystal City)의 고층건물들에는 국내외 스파이들이 득실거린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스파이 검거 외에, 스파이에게 정보를 넘기는 행위 등을 모두 모니터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연구원과 미국해군연구소의 연구원이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라 하더라도 비밀스런 연구내용을 서로 얘기할 수 없다. NASA연구원 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공무원이 한국의 대학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더라도 강연료를 받아선 안 된다. 돈을 받는 행위는 정보를 제공한 대가(代價)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일 미 공무원이 봉투를 받았다면 미국 정보기관은 귀신같이 이를 알아내고 처벌한다.

대북문제, 안보문제를 정치의 먹잇감으로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만, 태평천국의 삶에 취해 안보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는 것도 심히 우려된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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