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호 울산대 객원교수·철학박사

저기 종잇조각이 놓여 있다. 구겨져서 던져진. 누가, 언제, 왜 던졌는지 알 수 없다.

한 번 상상해보자. 그 종잇조각이 자기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기 몸이 물기에 닿으면 상처를 입는다는 걸, 누군가에게 밟히면 구겨질 수 있으며, 바람이 불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은 왜 자기 자신이 하필 거기에 있어야 하냐는 물음일 것이다. 자신을 맨 처음 던진 사람을 찾으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쪽으로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면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종이가 아닌 가구의 재료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종잇조각은 자신이 왜 하필 여기, 바로 지금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 종잇조각은 우리의 모습이다. 내가 왜 하필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장소에 태어나야 했으며,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살고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1에 2를 더하면 반드시 3이어야만 하는 이치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방황한다.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고자 몸부림친다.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예견한 철학자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한 미치광이의 입을 통해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위안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프랑스의 문인 알베르 카뮈는 언덕 위에 끊임없이 돌을 올려다 놓아야 하는 시지프의 모습에서 무의미한 일상과 일상 속의 역할극을 감내해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구토>의 로깡탱은 꼭 거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지 않아도 되는 마로니에 나무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구토증을 겪는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실존의 부조리함과 공허함’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상황에 직면하고도 ‘적절한 어휘의 부족’으로 인해 진지하게 대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철학의 역할 중 하나는 시민이 겪는 실존적 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포착하는 ‘유용하고 적절한 어휘’를 제공해주는 데에 있지 않을까? 김남호 울산대 객원교수·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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