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홍가 (주)쌈지조경소장·울산조경협회부회장

이 겨울 제주 여행 중이라면, 폭설이나 한파 소식에 좌절하지 말고 실내 전시관을 찾아보자. 제주 성산에 위치한 ‘빛의 벙커’(사진). 대가의 명작에 클래식 명곡을 함께 들으며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빛의 벙커는 한때 군사 통신시설인 지하 비밀 벙커를 개조한 전시 공간이다. 기능을 상실한 산업시설을 예술공간으로 되살리는 문화재생공간이다.

전시장 입구 육중한 철문은 앞으로 보게 될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실내는 스크린을 대신하는 콘크리트 벽면과 기둥이 전부다. 빛으로 재해석한 그림이 벽과 기둥을 뒤덮으며 강렬한 음악이 함께 변화를 거듭한다. 바닥에 앉아 감상하거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볼 수 있다. 평면적 전시 관람이 아니라 공연을 보는 것도 같고 정원을 거니는 것도 같다.

이번 시즌(2022년11월4일~2023년10월15일)은 세잔과 칸딘스키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첫 번째 시퀀스는 자연에 대한 찬가로, 세잔이 사랑했던 나무, 숲, 연못으로 구성된 정원 풍경이 펼쳐진다. 어둠과 대비된 빛의 향연에 웅장한 음악은 몰입감을 더해준다. 도입부에 펼쳐지는 풍경화는 세잔이 자연의 본질로 여겼던 프로방스의 풍경으로 비베무스의 채석장, 레스타크, 그리고 생트 빅투아르 산이다.

시각예술을 다루는 그에게 정원과 정원 속 식물들은 시시각각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드러내어 작품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엑상 프로방스 세잔의 아틀리에는 그가 직접 조성한 정원과 산책로가 있는데 직접 나무를 베고 정원 가꾸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프로방스의 강렬한 푸른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통영 전혁림미술관에서 만난 파란색 바다 그림이 오버랩된다.

이어 펼쳐진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우주를 유영하는 초현실적 경험을 제공한다. 다시 지구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정홍가 (주)쌈지조경소장·울산조경협회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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