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손자 5·18희생자에 대한 사죄
경위나 근거 등 미약, 진정성 의구심
미심쩍은 행동에 대한 설명 우선돼야

▲ 신면주 변호사

천지에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이다. 흩날리는 꽃잎은 시인들의 시심을 흔든다. 방랑 시인 김삿갓은 ‘세상만사 흩어지는 꽃과 같으니, 일생을 어둠을 헤치는 밝은 달처럼 살리라. (萬事付看花散日 一生占得月明宵)’ 고 읊조렸다. 그의 본명은 병연(炳淵)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20세 무렵 과거에 응시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 부사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로 과거에 급제했다. 후일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큰 삿갓을 쓰고 다녀 별명이 김삿갓이 되었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세상사에 대한 해학과 풍자로 살다간 인물이다. 그가 어줍잖은 벼슬길에 나섰다면 지금처럼 역사에 회자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양대 가치인 충 (忠)과 효(孝)의 갈림길에서 벼슬을 버리고 조부에 대한 속죄로 삿갓으로 하늘을 가림으로서 효의 길을 선택했다. 충과 효는 유교의 핵심 가치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충과 효가 부딪힌 것은 인목대비 폐위 논쟁이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받는 인목대비를 두고 대비가 실지로 역모에 내응했다 해도 자식인 광해군이 어머니를 벌할 수 없다는 폐위 반대론과, 왕은 공인이므로 모자간의 의리인 효보다 군신 간의 의리인 충이 더 중요하다는 폐위론이 부딪히게 되었다. 이 논쟁은 계해정변을 거치면서 폐위론자들은 정계에서 축출된다, 이로써 효가 완승해 모든 가치의 으뜸이 되었고 조선은 ‘효치국가’의 길로 들어선다.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체제인 지금도 여전히 효가 중요한 사회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는 연유다.

전두환의 손자가 갑자기 조부인 전두환을 학살자로 칭하며 5·18 희생자들에게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전두환은 사망할 때까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바 없다. 그가 신군부에 의한 12·12 쿠데타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점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가령 직접적인 발포 명령자는 아니라 하여도 5·18의 단초가 된 12·12사태의 주모자로서의 정치적 책임까지 회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간 전두환 본인이나 그 가족 누구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가운데 손자의 돌출 행동에 박수를 보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너무 많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경위나 근거에 대한 설명 없이 단정해 조부를 학살자라 칭하고, 핏줄에 대한 보편적 효심을 일말의 망설임이나 갈등 없이 차버리는 모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혹 5·18에 대한 사과를 빙자해 유산 등을 둘러싼 가족 내부의 갈등에 대한 보복적 감정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만약 5·18에 대한 사과를 핑계 삼아 다른 사적인 감정을 충족시킬 의도라면 오히려 광주 민주화 정신에 대한 모독이자 2차 가해다. 사과에도 예의가 있는 법인데 이러한 미심쩍음에 대한 해소 없이 용기 있는 청년으로 묘사하고 사과를 선뜻 받아들인 유족들과 정치권도 경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과가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조부를 학살자라 단정하게 된 경위와 근거, 마약이 취한 상태에서 폭로한 이유, 가족 간의 갈등 관계, 조부에 대한 효친을 버린 아픈 심정 등에 대한 토로가 맑은 정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젊은 친구의 치기 어린 간계에 놀아날 우려를 경계하고 훈계해야 마땅하다. 전두환은 평소 ‘죽창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로 시작되는 ‘떠나가는 김삿갓’이 18번 곡이었다고 한다. 이미 가계의 운명을 예측이나 한 것 아닌가 하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이 흩날리는 꽃잎만큼이나 어지럽다. 편 가름에 따라 정(正)이 사(邪)가 되고 사가 정이 되는 세상이라 올바른 정신 가지고는 살기 어렵다. 김삿갓이 자신이 살다간 조선 후기의 세태를 ‘청산 그늘에 사슴이 알을 품고 (靑山影理鹿抱卵) 흐르는 물소리에 게가 꼬리를 치네 (流水聲中蟹打尾) 석양의 스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夕陽歸僧繫三尺) 베 짜는 여인의 낭심이 한 말이 되네. (機上織女囊一斗)’ 라고 풍자하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사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신면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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