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자에게 자동차는 위험한 흉기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법행위에도
심신 미약 이유, 감형까지 수긍 어려워

▲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한 젊은이가 겪은 교통사고 소식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매일 접하는 사고 소식이지만, 20대 젊은이가 당한 날벼락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비극적인 일이다. 직장을 얻고 석 달 만에, 그것도 아침 출근길에 당한 음주운전 사고라고 한다. 며칠이 지나도록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와 그 곁을 지키는 부모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쉽게 찾지는 못할 것 같다. 의식을 찾더라도 병상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진단이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식이 오랜 교육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찾으면 모든 부모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첫 일터로 출근하는 자녀의 모습이 자랑스럽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의 뿌듯한 마음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기쁨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부모들은 이렇게 부탁한다. “길 조심해라” “차 조심해라” 아마 이 젊은이의 그 날 출근길도 부모의 격려와 염려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어린 학생이 학교 앞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희생되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차에 오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한 생명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어린 생명에게 가한 잔혹한 행동에 어떤 벌이 합당한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나 가엾은 어린 영혼을 위로할 진정한 참회나 속죄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술이 취해 정신을 잃었다고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자신의 권리를 보호한다고 비싼 변호사를 찾아다닐 지도 모른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내세우는 일은 이제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자동차는 누구나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필수품이다.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다. 그래서 자동차 운전은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습관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나 운전에 익숙하다고 해서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위험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운전에 대한 안일한 태도가 큰 사고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특히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일이 초래하는 위험은 예측하기 힘들다. 음주 운전자에게 자동차는 총이나 칼보다 위험성이 더 높은 흉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음주운전을 단순한 실수로 여긴다.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위법행위임에도 법적인 처벌은 소시민들의 정서와는 달리 관대하다. 심신미약이라는 감형사유가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유를 쉽게 수긍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집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가장 빈번하게 마주치는 것이 자동차다. 움직이는 차량뿐만 아니라 주차된 차량도 길을 걷는 사람에게 심리적 긴장을 가져온다. 특히 자동차로 점령당한 골목길을 걷는 것은 불편하고 조심스럽다. 좁은 길에서 사람과 자동차가 서로 닿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나다 보면 두려운 느낌마저 든다. 안전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정서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거리질서는 중요한 일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최소한의 자세나 태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곳도 우리들이 매일 걸어가는 이 거리이다.

선진국의 거리질서는 철저하게 사람을 중심으로 유지된다. 독일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작은 길에서도 건널목 근처에 사람이 서 있으면 모든 차량이 멈추어 버린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면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미국도 노란색 스쿨버스가 서면 차선이 비어 있어도 지나가지 않고 기다린다. 국토가 좁은 일본에서도 차량이 사람의 이동을 방해하는 거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국이다.

우리도 자동차 수출국이지만 도로 질서와 자동차 문화 수준은 이들을 따르지 못한다. 아직도 우리는 자신의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예사로 한다. 음주 운전도 작은 질서를 무시하는 이런 이기심이나 안일한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도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지 않은 이등 시민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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