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종교적 증오·이념 갈등으로
수많은 아이와 군인들의 헛된 죽음
이제 낡은 종교의 시대를 넘어서
생명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야만적 공격과 전쟁을 멈춰야 할때

▲ 유동우 울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워싱턴DC에는 링컨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의 왼쪽 벽에는 게티스버그 연설이 적혀있다. 첫 문단에 “ALL MEN ARE CREATED EQUAL”이라는 말이 나온다. 링컨 대통령이 존경받는 이유는, 백악관 앞에 유일하게 기념관이 있는 이유는, 노예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생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예제는 지금으로 생각하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만큼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과 노예제라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을 실천했다.

같은 시기인 1860년대, 조선은 ‘낡은 나라’였다. 신분제 사회였다. 서양의 과학문물을 처음 접한 조선사람들은, 자신들의 문물이 서양에 비해 뒤쳐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동도서기’라는 그럴 듯한 말을 좋아했던 것은, 낡음과 뒤처짐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정신승리에 가깝다. 신분제가 동양의 도라면, 평등이라는 서양의 도에 비해 한참 뒤쳐진다.

지금의 종교도 그런 면에서는 낡았다. 종교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죽는 것이 현실이다. 낡은 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종교 때문에 죽는 현실에서 잘잘못을 따진다. 낡은 종교의 시대를 이제는 제발 좀 넘어서자. 상대방의 종교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면 당신의 종교도 별 차이 없이 비합리적이다. 조금 덜 비합리적이라고 해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죽고 있는데, 상대 종교의 폭력성을, 보복의 정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면, 사실 별 차이 없이 비합리적이다.

▲ ChatGPT의 DALL.E3가 그린 ‘무너진 건물에서 팔레스타인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 펜화’.
▲ ChatGPT의 DALL.E3가 그린 ‘무너진 건물에서 팔레스타인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 펜화’.

종교가 낡고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듣기 싫을 것이다. 종교에 좋은 가치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보복이 아이들이 죽는 원인이라면, 종교라는 가치는, 미국의 노예제처럼, 조선의 신분제처럼 낡았다. 아니 더 낡았다.

종교적 신념이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면, 그 신념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신념이 맞다. 그런데 말이다, 낡은 종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잘잘못을 먼저 따진다. 상대방이 더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누가 더 나쁜지에 집중하게 만든다. 다양한 논리와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 그리고 자료들을 가져와 논점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을 제풀에 지치게 만든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니, 나는 안 나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아이들이 죽는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죽고 있는데, 서로 더 나쁜 사람이라며 비난과 보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다 나쁘다. 우리는 아이들을 많이 죽였지만, 잘잘못을 따져보고,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면, 우리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낡은 조직논리일 뿐이다. 그 낡은 조직논리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다. 조직논리에 대한 묵인은 아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볼 것이다. 당신의 낡은 종교적 비합리성을 버리면 된다. 아이들을 죽이는 근본적 원인이 종교라면, 그 종교는 필요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의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다는 수사적 표현이다. 링컨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믿으면 된다. 다른 종교를 가졌더라도 아이들이 적게 죽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렇게 종교를 계몽하면 된다.

미국 워싱턴DC에는 참전용사들을 위한 기념비도 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해 죽었던 미군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KIM, JEONG과 같은 한국 이름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이념 때문에 죽었다. 이념 때문에 죽었다니, 지금 보면 그저 안타깝다. 목숨보다 중요할 수 없는 이념 때문에 죽었다니. 그래도 그들은 직업군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추모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도 군인들의 죽음이 헛되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이념을 위해 목숨까지는 잘 걸지 않는다. 세상이 변한지 오래됐다. 그런데 아직도 종교와 종교적 증오로 아이들이 헛되게 죽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선 안 된다. 낡은 종교의 시대를 넘어서자. 아이들은 종교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 그 죽음이 헛되게 사라져서도 안 된다. 생명의 존엄성은 종교에 의해 달라지지 않는다. 공격을 멈춰야 한다.

유동우 울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