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에 조언 소용없다는 교훈
수장들, 어리석은 ‘원숭이’ 안되려면
본인의 말 줄이고 경청하는 자세 필요

▲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 행정학

원숭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 불을 피우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원숭이는 반딧불을 진짜 불로 알고 그것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이를 지켜보던 참새 한 마리가 그건 불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원숭이는 이를 듣지 않고 계속 반딧불을 잡으려고 날뛰었다. 참새는 원숭이가 하도 한심해서 쫓아다니며 그건 불이 아니라고 재잘거렸다. 화가 난 원숭이는 참새를 잡아서 땅에 내팽개쳐 버렸다. 인도의 우화집 ‘빤짜딴뜨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빤짜딴뜨라는 기원후 100년 경에서 500년 경 사이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화집이다. 인도의 현인이 왕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동물을 등장시켜 들려주는 우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원숭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조언이 소용없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달리 얘기하면 어리석은 자는 훌륭한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500년도 더 된 옛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어느 조직이나 높은 사람에게 직언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차하면 팽개쳐진 ‘참새’ 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 있는 인사라면 자신의 직을 걸고서라도 정직한 조언을 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첨꾼과 간신들이 더 설치고 각광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조직의 고위 인사들이 스스로 ‘원숭이’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독선에 빠지는 경향이 강하다. 전문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회의에서도 최고위 인사의 발언이 가장 길다.

TV 뉴스화면을 보시라. 주로 대통령이나 시장은 지시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는 수첩을 꺼내 놓고 열심히 받아 적는다. 이른바 ‘적자생존’이다. 진화론자 다윈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다. ‘말씀을 잘 받아 적어야 살아남는다’는 의미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주제넘게’ 조언을 하는 것은 ‘참새’가 되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권위주의 시대가 종식된 지 수 십년이 흘렀지만, 중국이나 북한의 당 대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기업, 대학 등 여러 조직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조직의 장(長)이 꽉 막힌 ‘원숭이’가 되는 데에는 우리의 과잉의전도 한 몫을 한다. 어디를 가던 가장 가운데 상석으로 모시고, 연설도 제일 먼저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별 의미가 없는 내용인데도 웃음과 박수로 환호를 보내준다. 겸손했던 사람도 이런 대접을 지속적으로 받다보면 과연 내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을 하게 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조직에 통용되기는 불가능하다. 윗사람의 선호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정보는 감춰진다. 반면에 위에서 원하고 받고 싶어하는 정보만 제한적으로 전달된다. 결국 이른바 정보의 왜곡이 발생하고, 이에 근거해 내려지는 결정들은 당연히 불합리한 엉터리 정책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좁게는 기업이나 대학의 구성원들에게, 넓게는 시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자명하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참새’가 되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먼저 조직의 장이 ‘원숭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본인의 말을 줄이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방적으로 지시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회의 참석자들이 하는 얘기를 잘 듣고 받아 적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빤짜딴뜨라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라 우화형식을 빌린 ‘통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현인이 어리석은 왕자들에게 귀를 열고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라고 들려준 1500년 전의 우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생생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새해에는 대통령이나 시장이, 장관이나 시 간부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 들으며 자기 수첩에 적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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