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개운포성,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
수영 설치기간·시설 위치조차 불분명
전문 학술연구로 제대로 사실 규명을

▲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공학박사

지난 8월7일 국가유산청은 울산 개운포 좌수영성(이하 ‘개운포성’)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울산시민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울산시 남구는 오랜 기간 사적지정을 위한 준비를 해 오던 중 드디어 그 결실이 맺어지게 되었다.

개운포 수군진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 태종실록 14권 7년(1407) 7월27일부터 확인된다. 태종 11년(1411) 실록에는 “개운포 만호 조민로의 직첩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조 3년(1457)에는 개운포 만호진을 혁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개운포진은 폐지 1년 후에 다시 설치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세조 5년(1459)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포에서 개운포로 이설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산포는 왜선이 처음 닿는 곳으로 군사들을 왜인과 섞이게 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부산포에 드나드는 왜인들에게 수영의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개운포는 경상좌도의 해군 사령부가 되었다.

개운포에 있던 좌수영은 중종 29년(1534)에 다시 부산포로 이설되었다. 개운포에 있던 좌수영이 부산포로 되돌아가기까지 여러 번의 이설 논의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울산 읍성을 쌓았던 성종 8년(1477) 2월11일 실록과 성종 14년(1483) 1월4일 실록 등에서 확인된다. 성종 24년(1493) 10월22일 실록에는 울산에 있던 경상좌병영 이설에 대한 논의도 보인다. 병영과 수영이 같은 고을에 있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중종대가 되면 5년(1510) 4월에 삼포왜란이 일어나는데, 왜란 발발 다음 해인 중종 6년(1511) 2월22일 실록에는 처음에 부산포의 수영을 개운포로 옮기는 이유가 되었던 논리가 다시 부산으로 옮기자는 근거로 뒤바뀐다, 즉, 많은 신하들이 입을 모아서 “부산포가 적이 들어오는 첫머리에 있으니, 수영을 이곳으로 옮기면 방어하기 편할 것 같다”고 왕에게 아뢰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중종 29년(1534) 9월29일 실록을 보면 임금은 “부산포를 경상좌도의 수영으로 삼아 수사를 거기에 있게 해야”한다는 좌의정 한효원의 주청을 받아들인다. 필자는 2016년 1월에 이런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를 서동욱 남구청장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이번 개운포 사적지정 과정에서 추진된 관련 용역보고서를 비롯해서 많은 자료가 중종 39년(1544)에 ‘개운포 좌수영성이 해운포로 옮겨갔다’고 적고 있다. 중종 39년(1544) 9월14일의 실록 내용인 “수영을 해운포로 옮겨야 한다”는 지사 이기의 보고는 1534년부터 부산포에 있던 수영을 다시 해운포로 옮긴다는 의미인데, 이때 개운포에서 해운포로 바로 옮겨간 것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다.

이처럼 1534년에 개운포에 있던 좌수영이 부산포로 옮겨간 이후 개운포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명종실록을 보면 1547년 1월18일자 기사에 ‘개운포 만호 김한문’이 등장한다. 이는 1544년에 부산포의 수영이 해운포로 이설되면서 해운포 대신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설치된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 전기의 경상도 수군 방어체제는 크게 바뀌어서 서생진을 제외한 타 지역 소재 수군진과 보가 명칭은 유지하면서 모두 부산 일대로 이전 배치되었다. 이는 당시의 여러 기록과 지도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개운진은 부산 좌천 정공단 부근에 있었다. 현종 즉위년(1659) 6월2일자 실록 기사에 ‘개운포 만호 김남두가 왜인에 의해 머리채를 잡아끌렸다’는 내용이 있는데, 개운포 만호가 부산에서 근무했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한편, <학성지>에 따르면 서생포진을 제외한 수군 기지가 모두 없어진 임진왜란 후의 울산도호부에는 인조 2년(1624)에 학성공원 아래에 새로 ‘전선소’가 설치되었다. 이곳에 모래가 퇴적되어 전선소 기능을 못하자 1651년 5월에 ‘3영에 소속된 수부를 동원해서 증성 아래 전선 정박처를 파냈다’고 <울산부선생안>에 나와 있다. 결국 전선소는 1656년에 개운포성벽 바깥 남쪽으로 옮겼다. 이 전선소 위치 또한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2016년 보고서에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번 사적지정 관련 모 신문사의 기사에 실린 ‘종합정비개념도’를 보면, 전선소 위치에 ‘패총야외전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경상좌수영성은 사적이 되었지만, 수영 설치 기간, 주요 시설 위치 등 가장 중요한 사실조차 명확하지 않다. 검증받은 전문가에 의한 학술연구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이 규명되고, 발굴조사를 통해 전선소 위치 등도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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