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꽃은 여름이 다할 무렵 피는 꽃이다. 장마가 지난 후 가지의 잎겨드랑이 사이에서 나온 꽃대에 흰색이나 보랏빛 꽃들이 앙증맞게 피었다가, 가을이 올 무렵 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마다 콩꼬투리가 열린다. 옛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콩꽃은 여름날 큰 비가 내린 직후 피었다가 꽃이 진 뒤 서리 내리고 겨울옷을 준비해야 하는 가을을 예고하는 꽃이었다.

15세기 문인 서거정의 <앞의 운을 사용하다(用前韻)>라는 시에는 그러한 풍경이 잘 나타난다.

▲ 김홍도의 ‘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홍도의 ‘타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길은 응당 도잠(陶潛)에 해당하고
시는 사조(謝朓)를 추억하노라.
신세는 유유히 지나가는데
세월은 성큼성큼 돌아가네.
콩꽃은 비를 맞아 떨어지고,
오이는 서리 맞아 살찌는구나.
귀뚜라미야, 길쌈 재촉하지 말아라
나는 이제 겨울옷을 준비하련다.

逕當陶靖節(경당도정절)
詩憶謝玄暉(시억사현휘)
身世悠悠過(신세유유과)
光陰得得歸(광음득득귀)
豆花承雨落(두화승우락)
瓜子待霜肥(과자대상비)
蛩婦休催織(공부휴최직)
吾今欲授衣(오금욕수의)

도잠(도연명)과 사조는 모두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이며, 첫 구절은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세 오솔길 황폐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남았구나(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노경희 울산대 국어문화원 원장· 저자
노경희 울산대 국어문화원 원장· 저자

‘공부(蛩婦)’는 귀뚜라미를 말한다. 가을밤에 우는 귀뚜라미를 ‘촉직(促織)’이라고도 불렀으니 빨리 천을 짜서 겨울옷을 만들라고 재촉한다는 뜻이다.

콩꽃이 피는 시기는 아직 벼를 추수하기에 한참 이른 시기라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백성들은 여름이 막 지나 피기 시작하는 콩꽃을 보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 꽃 지면 저 자리에 콩이 열려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에. 옛 사람들에게 콩꽃은 그런 꽃이다. 피었을 때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닌, 지고 난 후를 더욱 기대하고 기다리는 꽃.

노경희 울산대 국어문화원 원장·<알고 보면 반할 꽃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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