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남쪽 나라 찾은 김만철씨 일가
잇단 사기로 재산 잃고 겨울한파 신세
올 겨울 탈북자·이민자도 따뜻했으면

▲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올 겨울은 유난스레 춥다. 겨울답게 자주 한파특보가 발령된다. 겨울은 당연히 추워야 하는 법이다. 그 맛을 모른 채 데면데면 지내다가 ‘동장군’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요즘이다. 기상학자들은 이번 추위의 원인을 ‘편서풍(偏西風)의 사행(蛇行)’으로 진단한다. 동북아시아 중위도 지역은 연중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편서풍이다. 그런데 이 편서풍이 뱀처럼 구불구불 일면서 남쪽으로 사행하면 북극 한기를 남쪽으로 가져다준다.

편서풍의 이런 사행이 우리에게 북극 차가운 공기를 가져다주며 ‘냉동고 한파’의 맹위를 만들어준다. 추워질수록 누구나 ‘따뜻한 남쪽’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나는 따뜻한 남쪽하면 귀순한 지 36년이 지난 김만철씨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김만철씨는 1987년 1월15일 일가족 11명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항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남한으로 귀순해왔다. 그가 귀순하며 한 말이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왔다’였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국민은 더욱 환호했다.

필자의 취재기자 시절, 경남 남해 미조에 기도원을 짓고 정착한 김만철씨를 만나 인터뷰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인지 올겨울 추위에 김만철씨가 남쪽에서 따뜻하게 지내는지 그의 안부가 자주 궁금해졌다. 사실 김만철씨 가족이 찾아 나선 따뜻한 남쪽 나라는 처음엔 남한이 아니었다. 12년간 탈북을 준비하면서 11명의 대가족을 끌고 떠난 목적지로 ‘이상향’인 따뜻한 남쪽으로 정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탈출 선박인 50t급 청진호의 기관 고장으로 일본 영내에서 표류하다 츠루가항에 예인되면서 뉴스를 탔다.

남북한은 물론 일본까지 가세해 김만철씨 가족을 자기네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보이지 않은 이념전쟁을 펼치며 국제적인 뉴스가 됐다. 그들은 남도 북도 아닌 제 3국인 브라질 쪽으로 가길 희망했다. 우리 측의 끈질긴 노력으로 따뜻한 그 남쪽이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당시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북에서 귀순한 남파 무장 공작원 출신인 김신조,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까지 동원됐다.

남해에서 만난 김만철씨는 귀순하고 나서 지원받은 정착 자금 등으로 흰색 기도원 건물을 지어 놓고 행복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당시 귀순의 트레이드 마크인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왔다’라는 주제의 강연과 종교생활로 바빴다. 인터뷰 후 나는 그를 잊었다. 그와 가족들의 남한 정착이 순탄하리라 믿었다. 나는 그 시점에서부터 언론보도 등을 통해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았다.

그 뒤 사연을 알아보니 기가 막혔다. 그 기도원 운영을 맡았던 목사가 김씨를 꼬드겨 기도원을 담보로 4억원을 대출받아 필리핀으로 날랐다. 그것이 따뜻한 남쪽에서, 더욱 따뜻한 남쪽인 남해까지와 당한 그의 첫 ‘사기’였다. 김만철씨는 결국 기도원을 매각하고 빚을 갚았다. 이어 기사회생을 노리고 제주도에 부동산 투자를 했다. 이 역시 따뜻한 남쪽 나라 사람들의 기획부동산 사기로 밝혀졌다.

2007년 당시 한 언론이 탈북 20주년을 맞은 소회를 묻자 김만철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회랄 것은 없고, 사기꾼들이 하도 많아 얼떨떨하고 살기가 어렵다.’(연합뉴스 2007년 2월4일)라고. 그는 남해와 거리가 먼 경기도 광주 산골에 임시 건물을 짓고 살고 있었다. 2017년 귀순 30주년, 노인이 된 김만철씨는 경기도 부천에 컨테이너 건물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 많았던 ‘영생교’ 신도로 17년째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나는 김만철씨 일생이 편서풍에 떠밀려온 겨울 한파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 것은 그의 3남2녀 자녀들이 다들 남쪽 생활에 적응해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목숨을 건 그의 탈북과 귀순은 자식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의 초상으로 남았다. 편서풍이 북쪽으로 사행하면 따뜻한 공기를 가지고 올라간다. 그가 만약 브라질행을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탈북자가 2022년 6월 현재 3만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망자, 이민자 등을 포함하면 현재 2만7000여명이 우리와 살고 있다. 청진에서 의사였던 김만철씨 그도 이미 83세 고령의 노인이다. 그가 이 겨울 따뜻하길 빌어본다.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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