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로 폭우가 예상되는 올여름 장마
막힌 물꼬를 트는 등 미리 대비한다면
소중한 수자원으로 이용, 福이 될 수도

▲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여름은 힘들어도 더위가 최고의 맛이다. 그 힘든 맛은 바다든 산이든 찾아 떠나는 피서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맛을 반감시키는 첫 번째 요인이 장마다. 장마로 한반도 6, 7월이 다 젖고 마를 때쯤 8, 9월 태풍이 찾아온다. 그런 비바람이 되풀이되는 여름이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계절이 주는 자연의 보상이다. 풍성한 여름 농사를 이 철이 아니면 어떻게 누리겠는가.

여름은 또 가을로 이어지는 성숙의 계절이다. 여름이 만들어서 가을로 보내는 농부의 농사를 생각해보라. 가을의 황금 들판은 사실 여름의 선물이다. 가을의 사유가 깊어지는 것 역시 여름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의 고통이 가을의 본색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장마 또한 여름을 여름답게 만드는 하나의 통과의례다.

지난 25일 기상청이 장마를 선언했다. 장마는 ‘한반도에서 주로 여름철에 여러 날 비가 내리는 날씨가 지속되는 기상 현상’이다. 이는 동아시아 인접국의 숙명이다. 여름철에 반드시 찾아오는, 요즘 말로 ‘진상’ 손님인 셈이다. 그렇게 우리 민족에게 장마는 숙명이며 시련이었다. 장마 기간 평균 30~35일 동안 한반도 연 강수량의 30% 이상이 쏟아진다. 과거 물난리는 우리에게 세습되어온 재난일 수밖에 없었다.

베이비부머(baby boomer)인 우리 세대에게는 어릴 적 ‘수해 의연금’을 모금했던 기억이 있다. 장마에, 태풍에 물난리를 겪고 나면 피해 입은 이웃을 돕기 위해 전 국민이 주머닛돈을 털었다. 의연금은 자선이나 공익을 위해 모으는 기부금이다. 천재지변의 피해는 국가의 책임이지만 당시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했던 한국의 현실에서 모든 피해보상은 불가피하게 모든 국민의 공동책임이었다.

수해 의연금뿐만이 아니었다. 갖가지 재난과 재해마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우이웃돕기까지 국민이 동원됐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풍속도지만 자연재해는 국민을 하나가 되게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치산치수’(治山治水)란 말을 일찍 이해하게 되었다. 국가를 위해 식목일마다 나무를 심었고, 소나무 잎을 갉아 먹는 해충 송충이를 잡기 위해 소나무 숲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수해 의연금을 내고 나무를 심었던 일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오늘날 MZ 세대에 미뤄보면 격세지감이 생긴다. 그건 당시 베이비 붐 세대의 부모라면 제 자식들의 일이 당연한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

요즘 장마의 문제는 국지성 호우에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이 해마다 재난을 만든다. 26일 기상청에 따르면 제주에는 장마가 시작된 25일부터 26일 오전 7시까지 50~200㎜, 호남과 경남에는 20~80㎜의 많은 비가 내리면서 장마 시작부터 그 기세를 요란하게 뽐내고 있다. 이미 엘니뇨의 발생으로 예상되는 다우(多雨)로 올 여름 장마의 피해가 자못 걱정스럽다.

인간의 지혜나 과학이 어떠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드는 환경의 문제는 늘 예측불허로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는 것에 경계해야 한다. 장마는 충분히 우리를 단련시켰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지만 사람의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직자라면 반드시 장마철에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에게 장마에 대한 가장 큰 교훈은 내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언양이 고향이었던 ‘월성 이 씨’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7년 장마에 볕 안 드는 날 없고, 7년 가뭄에 비 안 오는 날 없다.’ 어릴 적엔 그 비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었다. 굳이 요약하자면 할머니 말씀인즉슨 무슨 일에서도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것이다.

세기는 21세기다. 우리 힘으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고 있다. 어떤 재난이나 재해든 우리는 다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다만 미리 막힌 물꼬를 트고 대비한다면 해마다 찾아오는 장마를 우리의 수자원으로 알차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장마도 우리에겐 복일 수 있다는 말이다.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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