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울산대 인문대학 공동기획
성본 스님의 ‘선의 역사와 사상’
존 힉의 ‘종교철학’
필립 얌폴스키의 ‘육조단경 연구’ 등
모두 90년대 출간된 서적이지만 절판
갓 태어난 책들을 가장 앞서 확보하고
널리 유통하는 것이 서점의 용기라면
모두가 포기한 책을 끝까지 지켜내고
간직하는 게 종합대학 도서관의 용기

▲ 안동섭 울산대학교 철학상담학과 교수

책이나 몇 권 소개할 요량으로 본교 도서관에 들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종교와 철학 코너를 한 바퀴 훑었더니 필자의 동년배쯤 되는 책들이 서너 권 잡힌다.

성본 스님이 지은 <선의 역사와 사상>(1994)은 선(禪) 수행의 전통을 BC 3000년경 고대 인도 서북부 지역의 명상전통에서부터 청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개괄한다. 단단한 필치로 풍부한 근거를 들어가며 선종의 선종됨을 풀어낸다. 특히 오조(五祖)에서 육조(六祖)로, 그리고 육조에서 하택신회(荷澤神會)와 마조도일(馬祖道一)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성본 스님의 전공분야인 만큼 매우 밀도 있게 전개된다. 그래도 본래 불교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인 만큼 비전문가가 읽고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1932~2010)가 지은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개정판, 2007)는 그를 도쿄대학 교수로 만들어준 역작이다. 그는 근현대 중국사의 역정을 설명할 적에 외부적 요인(곧, 서양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당시 학계의 트렌드에 반발했다. 현대 중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계기가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외부적 요인과 접촉하기 이전 시대인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의 문화와 사상에 대해 연구해 보았자 현대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설명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근대 중국 연구와 현대 중국 연구가 따로 놀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양자 간의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미조구치는 중국 사상사 최대의 문제아 이탁오(李卓吾, 1527~1602)를 그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중국적 근대정신의 뿌리가 되는 것, 어떤 원동력이 되는 것이 명나라 말기에 이미 존재했음을 역설했다.

존 힉(John H. Hick, 1922~2012)의 <종교철학>(4차 개정판, 2000)은 생김새부터 특별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귀염 뽀짝한 사이즈, 하얗고 맨들맨들한 표지 덕분에 붙잡는 순간 이미 기분이 좋다. 힉의 세계적 명성에 일조한 이 책은 세계의 여러 종교, 특히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철학적 질문과 답변을 분류하고 소개한다. 악의 문제를 다룬 제4장과 종교다원주의를 논하는 제9장은 특히나 힉의 전문 분야이므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간과할 수 없다.

쉽지 않은 내용을 명료한 언어로 풀어내는 실력은 언제 봐도 발군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필자는 남에게 종교철학 입문서를 추천해주어야 할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본서를 소개해 준다.

필립 얌폴스키(Philip B. Yampolsky, 1920~1996)의 <육조단경 연구>(1992)는 선불교 포교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본서는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본 육조단경에 대한 상세한 해제(1부)와 번역(2부)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자가 알기로 해당 판본이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례이다. 2차대전 시기 일본어 통역병으로 미군에 복무한 얌폴스키는 전후 풀브라이트 장학생 신분으로 교토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선불교를 연구했다. 이 시기에 선종사의 대가인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2~2006), 시인 개리 스나이더(Gary Snyder) 등과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1965) 이어서 2년 뒤에 문제의 본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위의 네 책은 모두 절판되었다. 오! 이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그 어떤 서점에도 새 책이 없다. 도서관에는 있을까? 울산시내 그 어떤 공공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UNIST 도서관에도 없다.

울산에서는 오직 울산대학교 도서관에서만 소장중이다. 다른 도시의 사정은 모르겠다만 울산시 안에서 위 책들을 구해보려고 한다면 (예컨대 존 힉의 저 앙증맞은 ‘종교철학’을 실제로 만져 보겠다고 한다면) 중고책을 구매하거나 울산대 도서관을 방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적어도 100년쯤 된 책들이 이런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도 하나의 물건인 만큼 언젠가 소멸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위에 소개한 네 권의 책은 기껏해야 90년대생이다. 어떤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필자의 눈에는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더 애처롭다.

좋은 책들이 이른 나이에 사라져가는 가운데 하필이면 울산대 도서관에만 온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 종합대학 도서관만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사회적 사명 같은 것이 있는 듯도 하다. 군대가 진격할 때는 가장 앞에 서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다. 퇴각할 때는 가장 뒤에 서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다. 갓 태어난 책들을 가장 앞서서 확보하고 진열하는 것이 서점의 용기라면 모두가 포기한 책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종합대학 도서관의 용기이다.

“먼저 가!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추격해오는 적을 단신으로 막아서는 영화 속 조연들의 숭고한 희생은 대체로 실패로 끝난다. 울산대 도서관의 용기는 아름다운 성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안동섭 울산대학교 철학상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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