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는 외면하고 강자의 이익만 보호
불공정이 공정, 부정의가 정의로 포장
공정·형평이 사라진 작금의 현실 씁쓸

▲ 박기준 변호사

올 여름은 뜨겁다. 하지만 분노든 열정이든 마음에서 솟아나는 열기만큼은 못할 것이다. 누명을 쓰고 재판정에 나섰을 때 두아는 감히 하늘과 땅을 원망한다. 두 줄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해와 달은 아침 저녁으로 내걸리고 귀신은 생사여탈권을 쥐었도다. 천지시여 맑고 탁한 걸 가려 주셔야지 어쩌자고 도척과 안연을 혼동하시나이까. 선행을 베푸는 이는 헐벗고 수명마저 짧은데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부귀를 누리고 장수까지 하다니요. 천지시여, 강자를 겁내고 약자는 깔보시니, 이거야말로 물 흐르는 대로 배를 내맡기는 꼴이로군요! 땅이시여, 좋고 나쁜 것도 가리지 못하면서 땅이라 하십니까? 하늘이시여, 어질고 어리석은 것마저 따지지 못하시니 하늘 노릇은 헛하셨구려’라고, 피눈물나게 외쳤다.

두아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시어머니를 위해 거짓 자백을 하고 죽는다. 결백을 확인할 수 있는 세가지 징조를 말한다. ‘자신의 목이 잘린 뒤 목에서 나온 피가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옆에 준비해 놓은 흰 비단으로 날아가 붉게 물들일 것이 하나요, 삼복더위지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자신의 시체를 덮을 것이 둘이요, 그날 이후 초주에 3년 동안 가뭄이 닥치리라는 것이 셋이다’라고. 그 말은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매우 극적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800여년전 중국 전제 왕조시대 고단한 민초들의 소설속 이야기는 시어머니를 위해 거짓 자백으로 죽음을 감수하는 비극적 운명을 노래한다. 연극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는 원대 잡극인 관한경의 ‘두아원’은 날건달 장려아와 아둔한 관리 도올, 돌팔이 의사 새노의의 죄를 징벌해 두아의 원한을 씻어 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판관이나 위정자들의 일 처리는 참으로 중요하다. 혹시 잘못되거나 공정하지 못하게 되면 억울한 백성들의 눈에 피눈물이 맺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로서의 공정성은 시민의 행복과 직결된다. 차선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사진 찍어 신고하는 세상이다. 결핍은 참아도 불공정은 참지 못하는 것이다. 생사여탈에 관계된 일이라면 말해서 무엇하랴. 법정에서 나의 진실이 거부당하고 상대의 왜곡 거짓이 인정되면 분노가 치민다. 누명을 쓰거나 억울하게 옥살이라도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같은 종류 법규 위반의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통합이라는 이유로 성은을 입어 죄다 사면받는데 사안이 더 가벼움에도 영문도 모른 채 배제된다면 또 어떨까. 도대체 정의의 여신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힘이 없고 밀어주는 세력조차 등짝에 업고 있지 못하면 예나 지금이나 무시당하는 것은 마찬가지, 서글픈 일이다. 공정과 형평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작금의 현실에서도 숨은 눈물은 존재한다.

공정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에 부응하면 정의는 이미 본질적 가치를 잃은 것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고 정의에 부합한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맞게 쥐어 주어야 바른 사회라 할 수 있다. 현실은 어떤가. 여기저기 필설과 외침이 분분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든 사람이 법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 있는 자와 권력이 없는 자 사이에 차별은 엄연하다. 앞에서는 정의라 하는데 속을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약자의 보호를 외면하고 강자의 이익에 부응하는 법 집행은 원성을 낳는다. 자칫 법이 타락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역사가 서슬퍼렇게 눈 뜨고 있음에도 불공정이 공정으로, 부정의가 정의로 포장되기도 한다. 끼리끼리의 선택적 차별을 버젓이 정의라고 내세우기도 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보이는 광경들이 많다. ‘좋고 나쁜 것도 가리지 못하면서 땅이라 하느냐, 하늘 노릇 헛하셨다’는 소설속 두아의 외침은 오늘날 현실에서도 울림이 있다.

박기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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