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황매산 아래 영암사터에는 부처님의 나라가 돌 이야기로 남아 있다. 황매산의 잘 생긴 바위들이 굴러 내려와 쪼거나 깎고 다듬어 만들어진 석조 유물은 제대로 된 부처님의 나라를 보여준다.
 화려함으로 비범함으로 때론 출렁이는 불법의 바다로 남아있는 유물들은 이 팍팍한 세상에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래서 내 발길이 잦은 곳이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날, 황매산 영암사지로 가보라. 물먹은 돌은 넘치도록 사랑스러움을 드러내 보인다. 비에 젖는 게 아니라 돌에 푹 젖어들고 만다. 돌 조각들은 물을 머금어 굵직하거나 섬세한 선을 드러내고 푸르스름한 색을 띈 화강암은 생명을 품게 된다. 천년을 아우르는 푸른 이끼는 사그라져 버린 옛 영화를 날실과 씨실로 엮어 세월의 무늬를 엮어 낸다.
 사자의 깃털은 한올 한올 살아 일어나고 벌린 입은 비로소 소리를 토해낸다. 물먹은 무지개 다리와 돌 축대는 무한함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한다. 암수 한 쌍의 귀부에 새겨진 귀갑문은 비에 젖어 강인함으로 살아나 돌 거북은 앞발을 들고 서서히 일어날 준비를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면 내 몸과 마음은 영암사지로 향해 열린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영암사지 행을 권한다.
 촉촉한 가을비를 기대했지만 청량한 기운만이 가득한 날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 아침 일찍 절터에 올랐다. 적당히 바람이 불고 햇볕은 부드럽다. 하늘은 티 없이 맑고 황매산 바위들은 우뚝우뚝 서서 절터를 굽어본다. 막 떠오른 해는 탑 그림자를 길게 만들어 낸다. 마른풀 냄새와 떨어져 쌓인 나뭇잎에서 풍기는 조락의 가을 냄새가 적당히 섞여 절터는 스산하고 쓸쓸하다.
 오늘은 마음먹고 탑을 만나러 왔다. 사실 영암사지를 찾아갈 땐 항상 쌍사자석등을 마음에 두고 간다. 절터의 중앙에 석축을 쌓아 돌출 되게 자리를 잡은 쌍사자석등의 오묘한 배치에 매번 놀라워하면서 그 앞에 오래 머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사자의 엉덩이와 토실토실한 다리를 만져보며 눈맞춤을 한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무지개다리를 오르내리며 돌과 하나가 되어 보려고 애쓴다. 금당지의 주춧돌에 돋을 새김 한 사자상에게 말을 걸어가며 들뜨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절터의 맨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절터를 나오면서 눈길을 한번 주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오늘은 다르다. 석탑은 부처님의 집이다. 절의 대표적인 유물이요, 신앙의 구심점이 아닌가. 영암사지 삼층석탑 또한 맨 앞에 위치하여 이 절터의 주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석등과 금당과의 일직선상에 놓인 탑이 있어 절터는 안온하다. 이제껏 석탑의 지닌 가치를 몰라 준 것이 미안해 종일 탑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높이 3.8m에 보물 제480호로 지정된 아담한 키의 석탑은 소박하다. 간결함이 돋보인다. 그만이 지닌 아름다움이건만 늘 멀리서 눈길만 슬쩍 슬쩍 던져 주어 그 깊이를 알지 못했다. 마침 탑 옆의 나무아래 작은 평상이 놓여 있다. 그곳에 앉아 가지고 간 차도 마시고 입안이 화한 박하 사탕도 깨물어 가며 탑을 찬찬히 그리고 열심히 본다. 그러다 황매산을 한번씩 올려다보거나 가을 하늘을 목 아프게 쳐다보기도 한다. 곁눈질로 석등을 훔쳐보는 재미도 여간이 아니다. 두 마리의 사자는 가을이라 그런지 살이 올랐다. 배를 맞댄 부분이 더욱 불룩하게 보인다.
 자리를 옮겨 중문지 주춧돌에 앉아 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간결하여 아름답고, 수수하여 정겨운 맛을 내는 탑은 슬슬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이중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방형 석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탑신에 비해 높은 기단과 지붕 돌의 층급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9세기 후반기의 석탑임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선명하고 상층 기단 갑석의 처마 밑에는 두꺼운 부연이 있어 소박하다. 갑석 윗면에는 2단의 초층 탑신 받침을 조성하였다. 높은 기단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보는 맛이 편안한 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다. 처마는 얇게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날렵한 반전을 보인다. 그 지붕 끝에 아른아른 가을 하늘이 머문다. 상륜부는 없으나 찰주공이 남아있다. 거탑이 아닌지라 치어다 높이 올려다 볼 필요가 없다. 내 눈 높이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아침 햇살을 받아 탑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황매산의 가을빛과 일치감을 준다.
 모산재를 넘나드는 바람이 탑을 쓰다듬고 지난다. 탑은 수줍은 듯 온 몸이 서서히 붉어진다. 가을날 아침 햇살은 황매산의 바위도 꽃으로 만들고 절터의 돌도 모두 붉은 빛을 띄도록 마술을 부린다.
 절터의 돌 틈 사이로 마른 풀을 딛고 쑥부쟁이가 작은 키로 피었다. 노오란 산국이 무리 지어 피었다. 가을을 깊이 들이 마시며 탑을 본다. 삼층석탑은 돌의 나라 주인답게 너그러운 품성을 보여준다.

△주변 볼거리
황매산을 가려면 의령읍을 지나게 된다. 의령은 의병의 고장이다. 그래서 의령읍 남산에 자리한 충익사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충익사는 홍의장군 곽재우와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곽재우 장군은 선조 25년 4월 왜병이 침입하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막았다.
 사당에 재향을 하고 곽장군의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경내에는 수령이 500년 된 모과나무가 눈길을 끈다.
 충익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절터인 보천사지가 있다. 벽화산 아래에 자리한 아늑한 골짜기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부도가 남아있다.
 흠 잡을 데 없이 견고한 삼층석탑은 보물 제373호이고 높이 3.35m의 팔각원당형 부도는 보물 제472호이다.

△찾아 가는 길
울산에서 황매산 영암사터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울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을 지나 진주 방면으로 가다가 군북 IC로 나가는 길이 수월한 편이다.
 군북IC로 나와 의령읍을 지나 단성, 진주방면의 도로 안내를 따라가면 20번 국도 대의면 소재지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33번 국도를 따라 삼가면까지 간다. 삼가면 소재지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 60번 지방 도로를 따라 가회까지 간다. 가회에서 황매산군립공원, 영암사지 안내를 따라 약 7㎞ 정도가면 영암사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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