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이 켜지는 오타루 운하의 푸른 저녁에 서서

눈의 나라 홋카이도(北海道)의 작은 항구도시 오타루에서 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날리는 싸락눈이 아니라, 아침이면 녹아버리고 마는 가벼운 눈이 아니라, 세상과 마음을 덮는 큰 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일기예보는 오늘 저녁부터 홋카이도 전역에 눈이 내린다고 합니다.
 196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을 읽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북위 35도10분에 위치한 따뜻한 항구도시, 진해에서 태어난 것이 슬펐습니다. 나는 눈을 보지 못한 채 자랐고, 그 따뜻한 도시에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북방의 겨울을 담은 문학작품을 읽게되면 가슴이 뛰도록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소설의 그 첫 부분을 아직도 외우고 있습니다.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듯했다. 신호소에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눈이 그리울 때면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하곤 하였습니다. 터널을 지나자 환하게 펼쳐지는 설국. 흰 연기가 뿜어 나오는 가운데 기차 바퀴는 요란한 금속성을 내면서 서고, 나는 그 기차에서 내려 눈을 맞으며 그대를 찾아가는 겨울 나그네이고 싶었습니다.
 홋카이도는 10월 산악지대에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눈의 나라입니다. 그리하여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4개월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입니다. 홋카이도는 겨울동안 6m의 적설량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1월과 2월의 평균 기온도 영하 2~4도라고 합니다.
 홋카이도의 관문인 하코다테에서부터 삿포로를 거쳐 오타루까지 달려오는 동안 만난 이곳의 대자연은 땅과 바다와 하늘이 함께 쓰는 한 편의 서사시였습니다. 몸은 감동을 느끼면서도 마음 속에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생깁니다.
 홋카이도 여행은 처음입니다. 홋카이도가 한국의 84% 면적에 인구는 12%쯤 되고 인구밀도는 7분의1 밖에 안 되는 여유 있는 땅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난 홋카이도는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대자연이 거침없이 숨을 쉬는 생명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부러웠고, 부러웠기에 제국주의였던 이 나라가 더 미워졌습니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오타루는 인구 15만의 작은 도시입니다. 작지만 도시 자체가 일본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건물들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줄지어 건재해 있고, 그 건물들을 이용해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상점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타루는 일본 내에서도 이름이 크게 알려진 오르골(orgel)의 도시입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을 들려주는, 유럽귀족들 사이에 유행했던 이 오르골이 일본인들의 축소지향의 성향과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한 때 전 세계 오르골 생산량의 9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오타루에는 오르골당(堂)이 있는데 수 천 가지가 넘는 오르골 상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류바람을 타고 "겨울연가" 주제가를 담은 오르골도 나와 있었습니다. 오르골당 입구에는 15분마다 요란한 소리로 증기를 뿜어내는 증기시계가 서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타루는 또 유리공예 제품이 유명합니다. 유리로 여러가지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쓰는 그들의 장인정신이 빚은 다양한 명품들이 갤러리에서 전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오타루의 운하는 일본은 물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입니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영화 "러브 레터"의 촬영지가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오타루 운하의 가로등은 가스등입니다. 오타루의 푸른 저녁이 찾아오고 가스등이 밝히는 시간, 문득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외치던 안부인사 "おげんきですか(오겡끼데스까)"를 내 안의 나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오타루 유리공예 상점에서 유리로 만든 펜 한 자루를 샀습니다. 잉크를 묻혀 글을 쓰면 종이 위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데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눈 위를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로 들립니다. 돌아가면 오타루의 푸른 저녁 색깔을 닮은 잉크를 찍어 제일 먼저 그대에게 사각사각 눈 소리를 담은 길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눈이 당도하긴 당도하려는 모양입니다. 바람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설국을 읽던 스무 살 청년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서서 북위 45도 가까운 곳에서 12월의 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행수첩〉
삿포로 신치토세공항으로 가는 항공기는 하루에 1편 인천공항에서 출발한다. 비행시간은 2시간 50분 정도. 한국에서 연간 2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찾아가다 보니 곳곳에서 한국어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라면, 게요리, 맥주, 스시(초밥)가 유명하다. 눈이 많아 스키 타기가 좋고 곳곳에 노천온천이 있다. 삿포로에서는 2월 초순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눈축제가 열리고 오타루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눈 속에 촛불을 밝히는 눈빛축제가 열린다. 삿포로 맥주회사를 방문하면 싱싱한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도 있다. 오타루에는 전통있는 스시 골목이 유명하다. 메뉴와 가격을 소개하고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숙박은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