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가 났다. 이골 저골, 이산 저산, 천지 강산에 꽃이 피어 어지럽다. 꽃과 바람, 빛이 한데 엉켜 출렁일 때마다 어지럽다. 자연이 이렇듯 맹렬한 기세로 봄기운을 뿜어내기에 중생들은 눈멀고 귀 먹어 기운이 쇠하는 듯 하다.

영덕의 봄은 온통 붉은 빛이다. 영덕의 오십천변과 지품면 일대는 복사꽃 흐드러져 선명한 분홍의 꽃 잔치가 무르익었다. 봄 햇살에 분홍빛은 낭랑하게 출렁이고 푸른 하늘은 더욱 선명하다. 꽃과 함께 나른함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봄이 주는 선물이다.

유금사 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무진장한 꽃의 향연과 이산 저산에서 숨가쁘게 피워 올리는 초록의 빛으로 밝기만 하다.

칠보산 유금사는 외지다, 좁은 산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망설이기도하고 미적거리다 지나치기도 한다. 경북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라는 주소처럼 골짜기가 겹쳐지는 곳에 있다. 영덕에서는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637년)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유금사는 조선 중기까지 사세가 번창한 절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사찰에 불과하다.

유금사 삼층석탑은 대웅전 뒤뜰에 있다. 아마 법당이 무너졌을 때 뒤로 옮겨 놓았거나 예전에는 탑이 있던 뒤편 영역이 금당자리였을 것이다. 작은 산사의 뒤뜰에 있는 탑은 외로움을 탄다. 한적하고 고요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대웅전 앞 너른 마당도 아니고 뒤편 언덕이라 산 그림자에 갇혀 버리는 시간이 많다.

삼층석탑의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봄꽃이 화사한 날에 탑을 만나러 갔다. 목련도 만개를 하고 벚꽃도 화사한데 오후 녘 햇볕 들지 않는 뒤뜰의 탑은 그저 쓸쓸하다. 오랜 세월 외로움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높이 3.2m의 아담한 탑은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함과 엄정함이 돋보인다. 그래서 은근히 빛나는 탑이다.

이중기단에 평면 방형의 일반형 석탑으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의 석탑이다. 상 하층 기단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들었고 지붕돌의 층급 받침이 4단인 점은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잘 보여준다.

하층 기단의 각 면에는 탱주 하나와 우주가 새겨져 있다. 갑석은 네 장의 판석으로 조성되었고 위에는 2단의 상층 기단 받침을 두었다. 상층 기단 또한 각 면에 탱주 하나와 우주를 두었다. 갑석에는 1단의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일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굄이 조성되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 돌이 각각 1매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모두 우주가 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 부분에 살짝 반전을 보여 날렵하다. 상륜부는 최근에 만들어 올렸다.

아무런 장식 없이 소박하지만 각부의 균형과 비례가 알맞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 맛을 주는 이 탑은 보물 제 674호이다.

칠보산은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이룬다. 그리하여 유금 마을을 보듬듯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은 자연을 거슬리는 법이 없다. 칠보산의 산세에 어울리는 탑이라면 아담하고 소박해야한다. 그리하여 탑은 산과 마을과 함께 어울려 천년을 이어 골짜기를 지키고 있다.

금을 손에 주무를 정도로 많다 하여 유금이라고 불리어진 산골 마을은 금빛보다 더 찬란한 봄 햇살이 마구 쏟아져 밭이랑은 포실하고 봄나물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금빛 나는 골짜기에 불국토를 만들고자 했던 자장율사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1천300여 년 전 아름다운 여왕은 곳곳에 절을 지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여자의 몸으로 지켜나가야 할 일이 많아 부처의 힘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칠보산 아래에도 큰 절을 지었을 것이다.

탑은 천년을 시간을 흔들어 깨워 봄을 맞는다. 그를 호위하듯 둘러싼 감나무, 잣나무, 소나무, 서어나무, 목련과 벚나무까지 봄기운이 완연하다. 탑 주변은 푸릇한 기운이 넘친다.

산 아래서는 꽃 때문에 멀미가 났다. 탑을 받쳐주는 한 그루의 벚나무는 외로운 탑을 보듬어 안고 볼을 비빈다. 흠뻑 봄을 머금은 탑은 수줍은 듯 내게로 안겨온다. 그 외로움이 닿아 가슴은 아릿하다. 이 봄에 외로움을 타는 건 유금사 삼층석탑이 아니라 집착에서 놓여나지 못한 나 자신이다.

돌아오는 길에 골짜기 가득 산벚꽃과 산복숭아꽃이 핀 <얼굴> 이란 마을을 보았다. 얼굴은 중생들을 잠깐 선경에 들게 하였다. 내려와 돌아보니 어둠이 서서히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유금사 삼층석탑은 골짜기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세월의 이끼를 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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