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다도반이 남도 일번지로 갔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일행은 '낫대 두러메니 기픈 흥을 금치 못해 펄떡 뛰는 고기' 잡아놓고 기다리시는 오늘의 주빈 고산(孤山) 선생과 우선 소주로 400여 년 만의 오랜 회포를 수작(酬酌)으로 풀었다.

보길도에선 가장 명당이라는 동천석실에서 손수 빚은 차를 한 잔 내 놓으며 이 자리가 천하제일로 차 맛 나는 자리라고 은근히 풍수지리 실력을 자랑했다.

연꽃 모양을 닮은 부용동을 한 바퀴 돌아 세연정(洗然亭)에 오르곤 "세상에 이런저런 힘들고 하찮은 일들이 있어도 다 씻고 살아야 한다", "어차피 붙잡아도 가는 세월이 아니더냐. 세상 별 것 아니다. 너무 애쓰고 살 필요 없더라"며 귀한 햇차 한 통씩을 건네 주었다.

선생은 51세 되던 병자호란 당시 조선 인조(1637년)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으로 정박한 곳이 보길도였단다.

선생은 문학 뿐만 아니라 주역에 능통해 풍수지리에 일가견을 지녔기에 직접 세연정과 동천석실을 만들었다고 했다.

세연지의 일곱 개 바위 중 혹약암(或躍岩)이 일행의 발길을 잡았다.

'혹 떼는 바위라' 선생이 임금 한 번 해볼 요량으로 총을 빼볼 심산은 아니었을 거고, 혹 이 세상 등지고 사는 자를 임금이 다시 부르면 성군으로 모셔 놓아야지 하는 야무진 다짐을 하진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세연정 안에 가장 크고 힘찬 바위를 혹약암이라 선생은 왜 이름 하였을까? (혹약암은 주역 제1과 하늘편 혹약제연에서 따옴) 혹약제연은 혹 뛰다가 잘못 되더라도 연못에 떨어지니 궁디(엉덩이) 깰 염려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쯤에 자신이 인간이 되었나 안되었나를 한 번 시험해 보자는 것일까.

아니면 이 참에 이제는 하찮은 세상과목은 다 떨쳐 버리고 신선으로만 살지, 만에 하나라도 하늘 목을 확 비틀어 잡고 세상을 혁명해 볼 어리석은 맘이 생기면 천하에 하수란 걸 기억하자는 선생의 다짐이었으리라.

일행 중 누가 或(혹)에 심자가 붙으니 이상하다고 고자질(?) 하는데 귀여운 동자들과 미희들이 어부사시가를 부르며 군무를 추고 나왔다. (요사이 유행하는 들차회와 산사음악회의 원형이었다)

우리도 신선경에 빠져 지는 해를 잊고 있는데 저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서 초의 스님이 점잖치 못하게 차솥에 물이 다 식는다고 연달아 핸드폰을 걸어 왔다.

이를 눈치챈 선생은 무슨 소리냐? 보길도에 오면 전복죽 맛 보며 밤바다와 일박해야 제 맛이라 야단하시니 어쩔 수 없이 일행은 어른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통리해수욕장 민박집까지 노래는 잔잔한 파도를 타고 젓가락 장단에 맞춰 간간이 이어져 왔다. "신선은 아무나 되며 사랑은 아무나 하나 전생에 복이라도 지어놔야지~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

우는 거시 벅구긴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석양이 기우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정승도 부럽잖다 만사를 생각 말자.

문수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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