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화사한 빛깔의 봄옷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여서 기분을 좋게 만드는 '왈츠음악'.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는 왈츠음악만큼 좋은 것이 없을 정도로 왈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이다.

'왈츠'라고 하면 우아하면서도 활기와 정열이 넘치는 화려한 3박자의 무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것은 18세기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추던 느린 3박자의 '렌틀러(Landler)'라는 민속춤을 예술적으로 닦아서 만든 것이다.

'왈츠의 왕'이라 불리는 요한 스트라우스는 아버지 슈트라우스와 더불어 전 세계인의 가슴속에 왈츠의 선율을 심어준 음악가이다. 이들은 '비엔나 왈츠'라는 독특한 왈츠를 만들었다.

비엔나 왈츠의 특징은 3박자의 반주에서 한마디의 3박자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첫째 박자와 셋째 박자가 짧고 둘째 박자가 길어지는 독특한 리듬에다가, 악절의 첫 부분은 느린 템포로 시작해서 점차 본래의 속도로 빨라지는 특징이 있다. 거기에 서주와 코다를 붙여서 단순하지 않은 제법 큰 형식을 곁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와 아들 요한 스트라우스는 이름이 같은데다 두 사람 다 왈츠의 대가였으므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왈츠의 아버지'. 그리고 왈츠의 걸작들을 더 많이 작곡한 아들을 '왈츠의 왕'이라고 구별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도 같은 뿐더러 같은 음악 장르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부자지간이 돈독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음악가의 길이 너무도 고되고 험난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아버지는 세 아들 중 누구도 음악가로 만들기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아무에게도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세 아들들은 오랫동안 아버지 몰래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게 되었고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결국 세 아들 모두 왈츠의 대가가 되고 말았다.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가출을 하고 말았다.

장남 요한 스트라우스는 6세 때 이미 왈츠를 작곡할 정도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어 19세 때 15명의 악단을 결성, 데뷔를 했다. 그는 이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비엔나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다. 이후 한동안 아버지의 악단과 경쟁을 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를 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악단을 인수해 유럽 각지를 순방하면서 더욱 명성을 높이게 된다.

요한 스트라우스와 연관된 큰 행사를 떠올린다면 해마다 새해에 마련되는 비엔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일 것이다. 빈의 명물로서도 유명한 이 연주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연말과 1946년의 새해를 맞아 전쟁의 상처로 암울한 시기를 격어야 했던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제1회 신년 음악회(New Year Concert)'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연주회는 지금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계속됐고, 지금은 세계 음악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음악행사가 되었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은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작품들이다. 마지막 앙코르곡은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다. 객석과 연주자가 일체된 광경 속에서 화려하게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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