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년세월 제자리 지킨 청송사지 삼층석탑 - 청송마을 이동석 옹

1958년 울산시에 보수 요청…수년 뒤 문교부 지휘 아래 작업
기계 없이 수작업 삽으로 흙 파고 밧줄로 돌덩어리 끌어내
출토품 빼내자 몸돌 꼼짝 않아 일부는 제자리 되돌려넣어
‘구술로 정리하는 울산 이야기’ 세번째 주인공은 청송마을에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동석(李東碩·84) 옹이다.
▲ 청송사지 삼층석탑의 보수를 처음 건의한 청송마을 이동석 옹.

10일 오전 울주군 청량면 율리 청송마을에 이르는 고갯길은 지난 밤 내린 눈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대로변 청량초등학교 문수분교에서 청송사지 삼층석탑까지는 5리길(약 1.8㎞)이다. 교통사고가 염려스러워 흩날리는 눈속을 그냥 걷기로 했다. 이 옹의 집은 문수분교와 청송사지 삼층석탑에 이르는 길 중간 어귀에 자리했다.

완만한 들판 한가운데, 눈처럼 하얀 백발의 이 옹이 삽작에서 서성이다가 “고생스럽지 않았냐”고 마중을 했다.

■ 1962년 청송마을 삼층석탑 올리다

청송사는 신라 제32대 효소왕(692~702년 재위) 때 창건된 절이다. 청송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전해질 만큼 상당히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절은 조선 중~후기 폐사되었고, 절터에 남은 청송사지삼층석탑(靑松寺址三層石塔·보물 제382호)이 옛 영화를 말없이 대변하는 중이다.

이 옹은 여섯 살 무렵 온 가족을 따라 청송마을로 들어왔다. 울산 전역에 흩어놓은 전답에서 당시 3000석의 세를 거둬들일 정도로 집안이 부유했다. 집안 대대로 학식도 높았다. 학성공원 꼭대기 비석에 새겨진 ‘오산대(五汕臺)’는 학식이 높았던 그의 고조부 오산(五汕) 이정화(李鼎和) 선생이 남긴 것이기도 하다.

▲ 보물 제382호 청송사지 삼층석탑.
어릴 적 놀이터였던 돌무더기를 예사롭게 보아넘기지 않은 것도 모두 글을 읽고 풍류를 알았던 조상의 영향인 것 같다고 슬그머니 집안자랑을 하신다.

“1958년 여름으로 기억 돼. 한국전쟁에서 돌아와 보니 여전히 석탑이 뒹굴고 있어요. 마을사람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습디다. 당시 이석수 문화계장한테 석탑 좀 바로 잡아달라고 부탁을 넣었지요”

당시만 해도 문화재와 연관된 업무는 울산 만의 독단적인 행정으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보고서가 경남도청으로 이관되기까지 수 개월이 지났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사진사와 함께 도(道) 문정과장이 마을을 찾아왔다. 여러 컷의 사진을 찍은 뒤 돌아갔는데, 그 뒤로도 기약없이 세월만 흐를 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부산일보에 ‘잃어버린 청송사 터를 울산 어귀에서 찾았다’는 기사가 실렸지 뭐야. 신문의 위력이 대단하더군. 기사가 실린 뒤에 성이 주(朱)씨라면서, 문교부 장학사가 대번에 나타나더니 사진을 또 수십 장을 찍어가는 거요. 그러고 2년 뒤 겨울에 주 장학사가 다시 나타났지. 봄이 와 땅이 해동되면 곧바로 수리작업을 하자면서 한, 두 달 숙식할 곳을 알아봐 달라지 뭐야.”

■ 금부처, 유리알 품은 채 천년세월 버텨

지금의 삼층석탑이 세워진 자리 옆에는 손(孫)씨 노인의 집이 있었다. 1962년 봄. 서울에서 온 장학사와 기술자들은 그 집 사랑채에서 수 개월을 기거하며 땅에 파묻힌 돌무더기를 파내고, 차례차례 쌓은 뒤 주변을 정리했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마을 장정들 8~9명이 ‘데모도’(공사장에서 기능공을 도와 함께 일을 하는 조공을 일컫는 말)로 나섰다. 요즘처럼 전자동기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일일이 손으로 흙을 파고, 밧줄로 묶은 뒤 힘을 합쳐 무거운 돌덩어리를 끌어냈다.

아래쪽 기단은 큰 사각돌 네 개가 합쳐져 석탑을 받치는 형상이었다. 기단 한 쪽 벽돌을 뜯어내니 빈 공간이 드러났고, 이어 나무로 만든 큰 그릇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손보다 조금 작은 금부처가 먼저 나왔어. 사리모양 같기도 하던데, 아무튼 팥알 만한 구슬이 수십 개나 쏟

▲ 청송사지 석탑의 보수과정을 기록한 이동석 옹의 자필 메모.
아졌지. 마을 사람들 모두 놀랠 수 밖에요. 그 속에 그런 것이 들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주 장학사는 연구도 해야 하고 큰 박물관 같은 곳에 제대로 보관해야 한다며 일단 수거한 물건들을 갖고 서울로 출발했다. 남은 기술자와 인부들에겐 돌덩이를 차례차례 쌓아 석탑을 만드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가장 큰 1·2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삿갓을 얹은 뒤 2층 몸돌을 들어 올리려는데, 장정 여럿이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홀린 것 같았지요. 더큰 돌도 ‘칭부로크’로 여러 번 감아올렸는데, 아무리 해도 돌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속에 품은 물건을 빼갔다고 탑신이 노했다는 둥 사람들이 수군대는데, 도무지 일이 진척이 안되지 뭐야. 당시만 해도 전화가 있었겠냐고. 부랴부랴 시내로 나가서 서울로 기별을 하니, 한참만에 전부는 아니고 구슬 몇 개와 부처만 다시 돌려줍디다”

새로 짠 유기 속에 되돌려 받은 것들과 함께 ‘몇날몇일 이러이러한 경위로 탑을 다시 쌓는다’는 문서도 넣었다. 오랫동안 지척에서 탑을 모셨던 손씨 노인은 작업이 다시 시작되는 날 이른 새벽, 목욕재계까지 한 뒤 사람들과 함께 고유제를 올리기도 했다. 옴짝달싹하지 않던 몸돌이 거짓말처럼 쑥 들리더니 이내 석탑 모양이 갖춰졌다.

■ 젊은날 부도밭에서의 추억담
이 옹에겐 삼층석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 청송사지부도(靑松寺址浮屠·울산유형문화재 제3호)와의 추억담도 있다. 울산이 시로 승격하기 직전인 1960년대 초반, 김현규 당시 울산군수에게 이리저리 흩어져 누운 부도 조각들도 바로 세워 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부처골’로 불리던 산자락 끝머리로 군수가 직접 나와 이리저리 부도를 짜맞추는 작업을 직접 지시하더니 “내가 바로 상부처”라며 농을 주고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마을에 있는 고적들을 부족한 내 힘으로 ‘보물’로 키웠다고 생각하니 뿌듯할 밖에요. 삼층석탑 인근에 할멈이 가꾸는 미나리꽝이 있어. 오가면서 석탑을 지켜보는 기분이 참으로 좋아요.”

한편 이 옹은 요즘 선조들의 문집을 발간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청안이씨 퇴사제파(淸安李氏 退思齊派) 종문으로 아직도 집안에 가묘를 모신 뒤 초하루와 보름마다 분향을 피운다.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무공수훈자중앙회 울산지회장·성균관유도회 울산시지부장·울산임란공신숭모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글=홍영진기자 [email protected] 사진=김경우기자 [email protected]
자문=박채은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관련 문화재 정보와 일부 차이가 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동석 옹의 개인 기억에 의존한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글임을 밝혀둡니다. )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