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봉진 판화작가

▲ 정봉진 판화작가
달별 선생님, 요 며칠 사이 춘삼월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눈과 비가 오다말다 하는 바람에 저희집 터앝에 있는 시무룩한 매화나무처럼 축축한 마음으로 하릴없이 풍타낭타 젖어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갓맑은 비취빛 하늘이라 저의 마음이 찰랑찰랑입니다.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대운산 자락의 잔설이 윤슬처럼 빛나는 이 아침, 문득 보고 싶은 한 사람이 떠오르네요. 당신의 외우이기도 한 그 사람, 물렁팥죽같이 착한 사람, 판화작가, 아니 우리의 그림쟁이 정봉진이 말입니다. 오랜 세월 그와 인연의 실타래를 이어오며 곰비임비 곱게 쌓인 추억의 갈피, 그 갈피를 살짝 펼치면 살구꽃 향기가 온 몸을 감싸고 오래오래 머물 것 같은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달별 선생님, 저는 그와의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은 잠깐 밀어두고 까만 밤을 홀로 지새우며 혹은 젖은 달빛에 울음이 섞인 술잔을 기울이며 한 땀 한 땀 고운 나무결에 새겼을 그의 혼이 내려앉은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달별 선생님, 그를 생각하면 ‘케테 콜비츠’와 ‘오윤’이라는 화가들이 머리에 스칩니다. 그들의 작품 ‘씨앗들이 짓이겨 져서는 안된다’ ‘애비’ 등과 함께 말입니다. 콜비츠가 1898년 제작했던 ‘직조공의 봉기’ 연작이 당시 권좌에 있었던 빌헬름 2세로부터 “시궁창 같은 그림”이라는 비아냥과 자신에게 “쓰레기 같은 화가”라는 모멸적 언사를 퍼부었음에도 우리 마음 속에 우뚝하게 남아있음은 무슨 연유일까요.

저의 짧은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충실하게 자신들의 작품 속에 반영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달별 선생님, 예술을 하는 작가들이란 얼마나 마음이 여리고 예민한 존재들입니까. 특히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들의 기본 속성임에는 무슨 말을 더 보탤 여지가 있겠는지요. 저 같은 개똥상놈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심성의 소유자들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화랑 벽면에 걸린 현실의 문제를 순수(?)하게 탈색시켜버린 추상화나 정물화를 북북 찢고 뛰쳐나와 당대 현실의 아픔과 인간의 뜨거운 문제들을 온몸으로 껴안았지요.

잡설이 길었지만 정봉진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 ‘뭍에 오른 처용’을 보면 단순히 벽사진경의 기복 종교적 관점이나 기존의 ‘관용’이나 ‘체념’ 따위의 개수작을 단번에 뛰어넘어 산업문명의 폐해를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그 작품의 ‘처용’ 형상을 보면 그 생동감에 놀라움과 감탄을 아낄 수가 없습니다. 또 있지요. ‘다윗과 골리앗’이란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보는 사람의 숨을 헐떡이게 하고 그 화폭 어딘가에 핏방울이 배여 있거나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비장미가 가슴을 조여와서 오래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니었지요. 뿐입니까. ‘온산 아가씨’나 ‘가슴에 별을 묻고’ 같은 작품들은 그 당시 온산의 공해문제를 정면으로 주시한 몇 안되는 귀한 판화였는데요.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에서 쫓겨나 신산스런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저의 기억에 뜨거운 그 무엇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것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처연함과 처절함, 분노와 절규까지 짓이겨져 도저히 눈뿌리짬이 시큰거려 얼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답니다.

달별 선생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그 사람 , 그림쟁이 정봉진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요. 아무튼 도나캐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님에는 분명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의 광기 서린 분노나 절규는 겉모습이고 그의 작품 배경이나 여백에는 비애와 연민의 정서가 자욱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지이지들의 아픔을 옹근 그대로 껴안았던 한 순정한 인간을 그 자욱함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감동을 어찌 잊겠습니까. 다시 그 두 작품에 귀를 조용히 기울여 봅니다.

달별 선생님, 그가 청춘을 보냈던 그 시절, 부라퀴같은 강자들에 의해 역사의 도린곁이나 진창길에 내팽개쳐져 애옥살이의 폭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이라고 없겠습니까만 참 씁쓸하고 잔인합니다.

달별 선생님, 그림쟁이 정봉진이 그토록 애연해 했던 버려진 사람들과 자연생명이 지금도 많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지구생명의 속살을 파헤치고 산과 강을 토막 살해하는 인간백정 그 자체가 암세포가 되어 자기증식을 하는 불경스럽고도 더러운 현대문명과 그 문명을 개발과 성장이라고 믿는 해괴스럽고도 어이없는 환상

▲ 정인화 시인
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또아리 틀고 있지나 않은지 따갑도록 되돌아보아야 할 줄 압니다. 부디 그의 작품 ‘보리피리’의 염원처럼 이 땅에 인간의 향기 가득하길 빌어 봅니다. 과욕이라 퉁바리를 주실지 모르지만 어쩌겠어요.

달별 선생님, 옹춘마니 저에게도 다행히 그림쟁이 정봉진에 대한 경념의 마음 한 자락 남아 있어 이렇게 결례 투성이의 편지를 쓰고도 그나마 덜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원래 글을 쓰는 재주가 워낙 용렬하다보니 결국 가리산지리산하다 말았네요. 그리고 오늘은 눈 앞이 뿌예지면서 자꾸 눈물이 날라해요. 아무래도 그림쟁이 정봉진 탓이지 싶습니다. 선생님도 인정 하시지요? 오늘은 그리움을 더해 ‘부용산’ 노래 부르며 숨 죽여 울겠습니다.

정인화 시인

※이 글은 정인화 시인이 정봉진 판화작가에 대한 칭찬을 이기철 시인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간접화법으로 이야기 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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