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선숙 소리꾼

▲ 이선숙 소리꾼
‘서편제’ 영화를 통해서 대중에게 다가온 판소리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여기 울산에는 생소하다. 잘 모른다. 그래서 이선숙이 독보적이다.

문화는 먹거리와 같다. 우리와 아이들이 안심하고 먹을 것은 얼마나 될까. 세계화와 거대 자본이 짜놓은 거미줄 같은 유통망 속에서 제대로 먹을 것을 찾는 일은 개천에서 사금을 찾는 격이랄까? 지금 이 시대에 우리 문화와 예술의 현주소는 위의 먹거리와 매 한가지. 특히나 우리 지역에서는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몇 안 되는 예술인들 중에 소리꾼 이선숙이 있다.

나는 그녀를 ‘그’라 지칭한다. 우리에겐 소리꾼 남자는 없고 여성 소리꾼 중에서는 ‘그’가 으뜸인 까닭이다. 심청가·춘향가·흥보가·수중가·적벽가 등 그 속에 담긴 그의 소리는 우선 힘이 있다. 울림이 있다. 감동이 없는 예술을 예술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지금 여기서 감동이 없는데 10년 뒤엔 눈물 한 방울이라도 감동 어린 울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난 최근 그 울림을 그의 새로운 작품인 창극 ‘흥보가’를 통해서 보았다. 그의 창작 판소리는 우리 시대에 희망을 제시한다. 세대 간의 대물림과 소통의 장을 제공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소리와 몸짓을 느껴보라. 어릴 적 맛있게 먹은 음식이 지금도 맛있듯이 문화의 소통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맛이 있다. 독차지 한 진수성찬보다는 소박한 먹거리라도 같이 어울려서 먹는 음식이 훨씬 맛나다. 그의 소리는 더불어 어울려서 같이 먹는 즐거운 만찬을 선사한다. 할아버지와 손자와 며느리와 시어미가 같이 즐기고 동화되는 공동체의 향연을 아낌 없이 준다. 지금 이 시대에 사라져 가는 어울림과 인간성의 회복을 열어준다.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에술작품에서만 찾으면 부족하고 왜곡된다. 그의 삶을 작품과 같이 보고 그 궤적에 준하는 시대를 조명하고 같이 꿰야 비로소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 그에 관한 일화가 있다. 어릴 적부터 신내린 듯 소리내림을 받은 것일까. 유독 그 쪽에만 집착하니 그의 부모님은 애간장이 탈 수 밖에. 중학교때 고(故) 김소희 명창에게 편지를 썼다지. “소리하고 싶어요. 소리 배우고 싶어요”라는 내용인데 선생이 기특해 하여 허락하고 부름을 받았으나 당시 부모님의 벽을 넘지 못하고 혼자서 독학 소리하다가 애둘러 돌아와서 ‘장월중선’ 스승을 만나 득음의 길을 연지가 19세 앳띤 소녀 때라지. 그 후로 30년 가까이 소리만 하고 살았으니 숙명이니 운명이니 보다는 온전히 소리에 미친 탓이지. 그 고통의 날이 얼마나 많았겠나 싶다.

이제 예술은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무언가 내게 들어와서 ‘나’라는 매개물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예술은 인간 상실을 넘어 인간의 고통과 아픔들이 극복되는 것. 같이 끌어안고 펑펑 울 만큼의 기쁨을 안겨주는 그것이 인간예술의 본성이다.

나는 그가 여지껏 받은 각종 상 따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지역, 이 세상, 우리 문명에 대해 그의 소리로 풀어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고 이미 지나간 세대와 다가올 세대를 아울러 손잡게 해야 할 그의 소리 쓰임새 또한 많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는 100년이 1세기로 기록되었다면 지금은 10년이 아니라 마치 평면의 책장을 연속으로 넘겨 움직이는 그림이 되듯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고 예술이 문화를 넘어 정체불명의 문명 속에 갇힌 모습이다. 비평이 없고 평가가 없고 문화예술이 오직 자본의 거미줄에 갇힌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 상태에서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고 우주인이다. 거대한 자본 UFO가 빨아들이는 선택은 1%의 우주인 뿐이다.

이미 우리 내장 안에 축적된 중금속을 해독하는 작업, 전 지구적 성인병을 고치는 작업처럼 자본이 지배하는 1%만을 위한 문명을 결자해지로서 그들이 풀어낼 리 만무하므로 철저히 싸우고 쟁취할 만큼의 자신감으로 곧추서야 한다.판소리는 한풀이가 아니라 낙관성과 건강성, 신명으로 밝은 미래를 당겨내는 씻김예술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의 자긍심과 같다. 그는 이제 창작 퓨전 판소리를 통해 세계를 묶어내고 엮인 갈등을 풀어내는 소리꾼 이선숙으로 우뚝 서야 한다.

▲ 정봉진 판화작가
우리가 품고 안을 세상,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을 이선숙의 삶과 소리가 이 시대를 관통하여 우주적 삶이 되면 그 삶이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이 우주가 될 것이 자명하다.

산수유·매화·진달래·냉이·쑥들이 지천으로 피는 이 땅에서 당신은 대나무 푸른 자태로 만파식적 노래하리라. 오너라. 너희들 와서 보라. 해와 달, 별과 ant 무리들아. 와서 같이 부르자.

‘쑥대머리 귀신 형용, 헝클어진 이 세상/ 적막옥방 찬 자리여, 어렵고 모진 세상/ 생각난 것이 임 뿐이라, 희망 소망 세상 향해/ 보고 지고 보고 지고, 열망 한다 참 세상아/ 한양 낭군 보고 지고, 더불어 같이 사는 참 세상. 문화 예술!’(춘향가 대목 풀이)

정봉진 판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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