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설이 된 고래의 꿈 - 장생포 고랫배 일등포수 김상복옹

일본인 배 타고 어깨너머 포경 배워…해방이후 본격 ‘포수질’
정월대보름 이후엔 서해로 장거리 조업…부인동반 포수 많아
수중청음기 등 장비 없던 시절 노련한 포수 경험에만 의존해

“장생포에서 내 이름 모리는 사람이 엄썼다. 고래로 묵고 사는 동네, 포수질 잘 하는 사람이 제일 아이가!”
김상복(85) 옹은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86년 상업적 포경이 전면 금지되기 까지 장생포 일대를 주름잡았던 고랫배 포수였다.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울산군수 할래? 고래포수 할래?”하고 물으면, 두말 없이 “포수할란다!”하던 시절이었다. 스물을 갓 넘기고 배를 타기 시작해 환갑 무렵 그만 두었으니, 무려 40년을 고래잡이로 지낸 셈이다.

■ 고랫배를 타다
김옹의 고랫배 생활은 사실 해방 전부터 시작됐다. 열여섯 되던 해 ‘배 타면 배는 곯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사람의 배 ‘호요마루’에 처음 올랐다. 포수였던 외삼촌이 길을 터 주었다.

▲ 장생포는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최고의 고래잡이 항구였다. 상업포경 중단과 함께 장생포항 대부분은 공장부지로 편입됐다. 사진은 1965년 당시 고래 해체장에 모습. 화보집 <울산, 어제와 오늘>(2005) 수록.
장생포를 출발한 배는 시모노세키를 지나 홋카이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배를 탄 그에겐 밥하는 ‘화장’일이 주어졌다. 함께 조업하던 무리 중에는 남극까지 다녀오는 배도 있었는데, 어린 김옹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일년이 지나니 삼등갑판원, 일년이 더 지나니 이등갑판원이 됐다. 홋카이도에서는 향고래, 대왕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보리고개, 쇠돌고래, 밍크 등 온갖 종류의 고래가 다 잡혔었다. ‘포수질’은 일본인 뱃사람을 도와가며 익힌 체험과 경험의 산물이었다.

홋카이도 생활은 8월 해방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돌아오는 길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기차 타고, 밀선을 타고, 부산에 다달은 뒤 또 기차를 타고 덕하역에 내렸다. 그 곳에서 장생포까지는 걸어왔는데, 어느덧 길옆 논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나는 좀 낫지. 월급을 꼬박꼬박 집에 부쳤거든. 근데 내 친구놈 하나는 일본 금고에 예금을 했는데, 고마 수년치 월급을 하나도 몬 건지고 안 왔나. ‘그 돈만 있었어도 큰 부자 됐다’는 소리, 아직도 듣는다.”

■ 뱃사람 부부는 금슬도 좋아

해방 후 일본인 선주들이 빠져 나가자 장생포에는 고랫배가 몇 척 남지 않게 되었다. 승선 인원수에 비해 뱃사람이 남아돌게 된 것이다. 기존 ‘조선포경’과 새롭게 세워진 ‘대한포경’ 등 서로 다른 회사에 소속된 뱃사람들끼리 싸움이 붙기도 했다. 김옹은 일거리를 찾아 포항에서 배를 탔고 1년 여 만에 포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어 기득권을 장악한 대한포경에서 요즘말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뒤 다시 가족들이 있는 장생포로 돌아왔다.

김옹은 ‘제1청진항’을 주로 탔다. 가깝게는 방어진 앞바다에서 고래를 잡았다. 멀게는 구룡포, 죽변 등을 너머 강원도 앞바다까지 다녀왔다. 60년대, 70년대 들어 고래잡이가 성황을 이룰 때는 저 멀리 울릉도·독도까지 고래를 잡으러 나갔다.

“고래고기 상인들이 선주로 나서면서 고랫배가 엄청 늘어났지. 붉은 새우뭉치가 바다 위로 둥둥 떠다녔는데, 공단이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그기 없어진기라. 묵을 게 없는데 참고래가 오겠나. 고랫배도 마찬가지다. 북으로, 동으로, 자꾸자꾸 먼바다로 나갈 수 밖에…”

5월부터 11월까지는 그래도 동해권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한겨울을 난 뒤 정월대보름 이후에는 장생포 고랫배 대부분이 서해안으로 조업을 나갔다. 흑산도, 어청도, 대청도 인근까지 배를 몬 뒤 그 해 4월까지 그곳에 정박하며 고래를 잡았다. 아낙네들 중에는 남편 배를 타고 같이 떠나는 이도 많았다. 밥을 해 준다는 핑계삼아 섬 관광을 할 요량이었다. 배에 여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속설은 장생포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떠난 고랫배 선원들은 아예 그곳 섬마을에 3~4개월 장기방을 빌려서 살림을 차렸다. 뱃멀미가 심한 아낙네는 버스를 타고 군산항까지 달려간 뒤 그 곳에서 객선을 타고 남편을 쫓아가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빚어졌다.

■ 눈 밝은 포수, 고래를 잡다

예전의 고랫배는 요즘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물속 고래의 동선을 감지하는 ‘소나’(수중청음기)도 70년대가 다 지나가고서야 등장했다. 포수 김옹이 한창 이름을 날리던 시절은 오로지 타고난 눈치와 오랜 경험에

▲ 고래잡이 어선의 포수 출신인 김상복옹이 자신이 잡았던 고래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 비롯된 뱃사람들의 눈대중과 손대중이 전부였다. 고래가 나타날 물길을 미리 짐작하고,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단 한 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포를 꽂아야 고래를 잡을 수 있었다.

“한 20분 만에 한 번씩 고래가 숨쉬러 올라온다. 대여섯 번씩 숨을 몰아쉬는데, 때를 놓쳐서 고래를 못잡으면 갑판장이 다음 번 숨 쉬러 올라올 데를 미리 알려주는기라. 미리 가서 안 기다리나. 눈이 밝아야 포수질을 잘한다. 뚫어져라 보는데, 물밑에서 고래 몸통이 어른어른 하면서 물 색깔부터 달라진다. 어림잡아 20m쯤 떨어진 곳에서 포를 쏘는데, 쏘기 전에 찌리리 감이 안오나. 벼르던 놈을 잡았을 때 기분은 말로 다 몬한다.”

무려 80자(약 25t)에 가까운 참고래를 잡은 일도 있었다. 잡은 고래를 장생포로 데려오지 못하고, 죽변에서 해체를 했다. 덩치가 워낙 커서 한 번에 해체하지 못하고 반쯤 갈라낸 뒤, 다시 올려서 나머지를 해체했다.

“안 된 일이지만, 그 놈 태중에 새끼가 두 마리나 들어 있더라고. 한 마리씩 들어앉는 것이 보통인데. 두 마리 모두 17~18자는 족히 넘었다 아이가. 희한한 일을 말로 다 몬한다.”

김옹의 집은 장생포 외환은행 뒷골목에 있다. 어업조합이 방어진으로 옮겨간 뒤 그 사택 부지를 매입했고, 그 자리에 집을 지은 것. 가지고 있던 큰고래 이빨은 박물관에 기증을 했다. 자잘한 것들도 많았는데, 하나둘씩 선물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 가져가서 이제는 하나도 없다. 그래도 최고의 포수였던 김옹의 머릿속엔 아직도 뱃머리 파도와 고래 우는 소리가 맴도는 듯 했다.

글=홍영진기자 [email protected]  사진=김경우기자 [email protected]

 자문=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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