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숙 시인

▲ 조숙 시인
필자는 소릿길에 들어서면서 옛 스승님들로부터 “소리를 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 말은 굳이 예술가가 아니어도 세상 사람에게 모두 소용되는 말이긴 하지만, 인간의 감성을 움직이는 예술가들이 꼭 새겨 들어야 할 약석지언(藥石之言)이 아닐까 싶다.

이같은 면에서 볼때 다른이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고 남의 일도 내 일인 양 신명을 다하는 진솔한 모습에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조숙 시인이 생각난다. 그분의 면면을 할애된 지면으로 간략하게나마 소개할까 한다.

그는 진정한 사회봉사가이다.

노자(老子)는 이런 말을 했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부리며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굳센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 <편용편(偏用篇)>과 <임신편(任信篇)>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만고의 진리처럼, 내가 알고 있는 조숙 그는 물처럼 우리 사회의 골목골목 스며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조그마한 체구를 가졌으나 결코 물러섬이 없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가졌으나 큰 소리에 절대 지지 않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 물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남들보다 시간을 배로 쓸 수 있는 신통력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그 예로 지역의 미혼모 시설에서 글짓기를 통해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식사 당번과 텃밭 일구는 일, 바느질 등 궂은 일을 스스로 앞장서 척척해 낸다.

두 아들 진학을 끝낸 올해 진탕 놀아야겠다고 선언한 그가 열심히 노는 곳은 여전히 부드러운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진탕 놀겠다는 것이 이거냐고 물으면 그는 재미있는 것이 최고의 놂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가장 그다운 말이리라. 내가 즐겁지 아니하면 그들이 어찌 즐거우랴.

그는 유능한 카운슬러이기도 하다.

마치 먼 살골짝에서 발원하여 나무뿌리와 풀잎, 그리고 흙과 작은 돌에 부딪히며 재잘재잘 흐르는 도랑물 같다. 큰 강물의 위엄이나 물살의 위협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가 있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싱싱하다.

그는 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큰 뜻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출사표를 던진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서 패가망신하는 것을 익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아무리 큰 뜻을 세운들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하지 않는다면 큰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 누가 들어주겠는가.

그는 시끄럽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어떠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듣는다. 최대한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소리꾼의 소리에 고수가 추임새로 화답하듯, 굳은 땅속으로 물이 스며들 듯, 콘크리트 바닥 사이로 풀이 돋아나듯, 견고함을 통통 두드리는 듯한 그의 화법과 상대에 대한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함께 생각하는 자세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의 또다른 직업 중 하나는 시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필자는 그의 시와 시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렴풋 짐작가는대로 시가 소설과는 달리 진솔함을 요구한다면 그의 생활과 사유의 편편을 보아 아마도 좋은 시인 임에는 분명하다. 다음은 그의 시 중 ‘무척 철학적인 돌탑’의 한 부분이다.

…일테면 그녀의 치마에 피어있던 능소화가 골목길을 반 너머 채우고/ 닭울음소리 없는 닭장 낮은 지붕에 연녹색 흥부네 박이 크고/ 나팔수 같은 분꽃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탑리에서 낯익은 모퉁이처럼 뒤돌아서있는 나를/ 탑리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낯선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후략)

일생을 소리로만 살아오면서 문장을 채우는 일에 어눌하여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었을까 싶어 한편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겨우 한정된 지면을 메운다.

이선숙 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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