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진실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하고 시고니 위버와 벤 킹슬리, 그리고 스튜어트 윌슨이 출연한 ‘진실’(1994)은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고문, 과거청산, 민주화, 국민화합 등의 문제를 다룰 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계적인 인기를 끈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극 ‘죽음과 소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영화의 공간은 남아메리카의 어느 국가의 해안가에 위치한 집이며, 시간은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선정부가 들어서서 민주주의로 전환을 시도하는 시기이다. 등장 인물은 파울리나, 헤라르도 에스코바르, 그리고 로베르토 박사다. 헤라르도는 과거 군사정권 아래서 저질러진 극악무도한 만행을 조사할 인권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다. 한편 그의 아내 파울리나는 독재정권 당시 비밀경찰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헤라르도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았던 여인이다.

어느 날 헤라르도가 대통령과 만나고 해안가의 집으로 돌아오던 중 폭풍우 속에서 차가 펑크 난다. 어쩔 줄 모르던 그의 앞에 로베르토 박사가 차를 멈추어 그를 집으로 데려다 준다. 그런데 로베르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나는 15년 전에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고 자기에게 전기고문과 성폭행을 가하던 고문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을 가린 채 당한 일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와 그가 즐겨 쓰던 몇 가지 말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라르도와 로베르토는 술을 마신 후 해안가의 집에서 잠이 든다. 파울리나는 즉석에서 복수를 계획하고, 로베르토를 결박한다. 이후 영화는 세 등장인물의 심리적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가령 헤라르도는 처음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여러 특징들이 미란다와 너무나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분노와 복수심을 느끼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린치를 가하면 위원장인 자신의 미래가 불안해질지도 모르며, 죄인이라도 함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변호사로서의 의식 때문에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못한다.

헤라르도는 파울리나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로베르토에게 진심 어린 참회의 고백을 듣는 것임을 알게 된다. 끝까지 자기가 고문관이었음을 부정하던 로베르토는 결국 죽음에 직면하자 자기가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그의 고백을 듣자 파울리나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그 의사도 결국은 비정상적인 시대와 상황이 만들어 낸 역사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파울리나는 그를 용서하면서 15년간 자신의 삶을 짓눌러왔던 질곡에서 벗어난다.

이 영화는 무대가 되는 국가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그곳이 칠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정황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헤라르도는 인권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형식적이 아닌 내실 있는 조사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파울리나는 독재정권 아래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독재의 후유증을 떠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사방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고문자들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레티히’ 위원회라고 불린 칠레의 인권진상조사위원회가 사망이나 사망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지만, 범죄자를 밝히거나 처벌하지 못하게 되어 있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독재를 경험한 후에 들어서는 전환정부가 국민화합을 이룰 때이며, 독재의 기억을 잊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망각의 정치를 통해 독재의 역사적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전환 정부들은 과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최우선 과제로 ‘앞으로 올 것’에 더욱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정치인들은 미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기억의 문제를 ‘국민화합’이라는 명분 아래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기억은 자꾸 모습을 드러내면서 국민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독재의 상처는 정치적 차원의 구호로 쉽게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국민화합의 문제는 망각의 정치가 외치는 구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문자나 독재 정권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방식의 과거청산을 통해 가능하다. 이 영화는 진실을 드러내고 이 진실을 통해서만 진정한 용서와 화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혹은 독재를 경험한 여러 나라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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