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스팽글리쉬

‘스팽글리쉬’는 흔히 코미디 영화로 분류되지만, 문화적 관점에서는 미국과 멕시코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스팽글리쉬’는 스페인어(Spanish)와 영어(English)의 합성어다. 다시 말하면, 미국식 스페인어이다. 감독 제임스 브룩스는 ‘스팽글리쉬’를 통해 언어장벽이 유발할 수 있는 혼란뿐만 아니라 두 문화의 여러 문화적 충돌 현상을 그린다.

이 영화는 크리스티나가 입학사정관에게 보낸 에세이의 내용을 따라 전개된다. 남편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플로르와 그녀의 딸 크리스티나는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불법 이주를 한다. 모녀는 라틴계가 많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다. 플로르는 영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인 클라스키 부부의 집에 가정부로 취업하고,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클라스키 가족이 휴가기간 동안 근처 별장에서 보내기로 하자, 플로르는 딸을 데리고 클라스키 가족과 함께 보내게 되면서 갈등이 점차 드러난다. 클라스키의 아내인 데보라가 자신의 양육방식대로 크리스티나를 대하고, 크리스티나가 점점 미국화 되는 모습을 보고 플로르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게 된다.

‘스팽글리쉬’는 멕시코 불법 이주자가 미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취업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여러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마초’적 남성상이다. 플로르와 크리스티나가 미국으로 떠나오게 된 배경에는 가정을 버린 남편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편모가정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가지고 있는 ‘마치스모(남성우월주의)’의 영향이 크다.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서 ‘남성다움’은 물리적이나 정신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려는 남성상이다. 이 영화에서는 플로르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 남편은 부드럽고 세심한 남성상인 존 클라스키라는 미국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된다.

또한 ‘물질주의’와 ‘외형주의’ 중심의 미국문화와 내면적 가치를 강조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차이도 엿볼 수 있다. ‘스팽글리쉬’에서는 데보라를 통해 전형적인 미국문화를 희화화 하고 있다. 데보라는 모든 걸 금전과 물질로 해결하고자 한다. 또한 자신이나 딸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외적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반면 플로르는 이런 데보라의 태도를 거북해 하면서, 자신의 주관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플로르의 생각과 행동은 전통적인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미국식 ‘개인주의’와 라틴아메리카의 ‘가족중심주의’도 살펴볼 수 있다. 데보라는 딸 버니스에게 줄 옷을 사오지만 그 옷은 그녀에게 너무 적다. 어머니가 옷에 몸을 맞추려고 요구하자, 화가 치민 버니스는 자기 방에 ‘혼자’ 남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대응한다. 크리스티나가 플로르에게 보인 가장 미국적인 반응도 엄마로부터 떨어져 있겠다는 것이었다. 플로르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모습은 바로 크리스티나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즉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스팽글리쉬’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와 그로 인한 크고 작은 문화적 충돌·혼합은 이미 다문화·다민족 사회로 자리잡은 미국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하나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매우 강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이미 미국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30개국이 훨씬 넘는다. 미국은 세계에서 멕시코, 콜롬비아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2050년에는 ‘라티노’ 인구 비율이 전체 미국 인구의 3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미래의 미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화 역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다문화 사회’, ‘다문화 가정’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며, 우리가 직면하고 또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변화다. ‘스팽글리쉬’에서 보여주는 상황이나 설정은 다르겠지만, 우리사회 곳곳에서 그와 유사한 다양한 문화적 충돌과 혼합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다문화 사회’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깊은 핵심은 ‘정체성’변화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문화는 언제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고, ‘정체성’ 또한 불변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조화롭고 따뜻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이는 ‘열린 마음’으로 우리와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순주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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