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김홍조와 학성공원
한말 토지 재등록 과정서 먼 친척에 소유주 변경 추정
후손들에 상속돼 90년대 초반 보상금 수령 소문 돌아
사회환원 통해 시민공원 세웠던 추전 선�

▲ 추전 김홍조 선생이 기증한 부지에 만들어진 학성공원 전경. 경상일보 자료사진
구한말 ‘울산의 선각자’로 불리는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 1868~1922년) 선생을 두고 많은 이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이라 평가한다.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고, 남 몰래 자금을 융통해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였다고도 전한다.

울산 중구 학성공원 또한 김홍조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다. 이같은 내용은 백과사전 등 학성공원을 알리는 각종 기록물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한말에 창간된 경남일보 사장을 지낸 김홍조가 1913년 2만3141㎡의 땅을 울산면에 기증함으로써 공원이 생겼다’고 돼 있다.

김홍조 선생은 자신의 땅을 사회에 기증함으로써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 올라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울산 최초의 근대 공원이자, 이후 수십 년 동안 울산 유일의 공원으로 자리매김하며 다양한 행사를 유치하는데 밑바탕이 된 것이다.

▲ 구술작업에 참여한 김택팔옹. 건강이 좋지 않은 김 옹은 요즘 성안동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는 중이다.

김홍조 선생을 ‘백부님’이라 부르는 조카 김택팔(金澤八·91) 옹은 그래서인지 학성공원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어릴 적 학성공원이 개장됐을 때가 생각 나네요. 백부님의 공덕을 치하하는 비석을 세우고, 각종 행사가 이어졌는데, 한 마디로 대단했었지. 울산에 그런 큰 잔치가 없었어요. 행사가 열리던 당일 학성공원에는 술과 음식이 넘쳤고, 백부님의 공덕을 기리는 뜻을 담아 술잔이 만들어져 돌려졌지요. 아무튼 그날 모인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보따리 그득하게 음식과 술이 손에 들려져 있었지요.”

울산공원(학성공원) 개원에 대한 기록은 1927~1928년 조선·동아일보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듬해인 1929년에 거행된 김홍조 공덕비 제막식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있다. 부산지국 특파원이 쓴 4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장문에 걸쳐 김홍조에 대한 업적을 기린다.

‘한말 정변으로 인하야 깁흔 뜻을 품고 일본에 망명하야…모국의 혁신을 위해야 정치적으로 만흔 활동을 하얏고, 고국에 귀래하야서는 경세의 목탁인 신문을 경영하야 몽매한 민중에게 만흔 지도와 계발의 공을 들이고…농산 수산 기타 각종 산업장려에도 만흔 노력을 기울여…자가의 산장 명소 수만평을 공공단체에 제공하야 그것으로 하야금 만인들의 낙원을 맨들게 하는 등….’

하지만 그의 큰 뜻이 담긴 학성공원에는 사실 아는 사람만 아는,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숨과 그늘이 숨어 있다. 광대한 학성공원의 일부 부지가 추전 선생의 명의가 아닌 다른 이의 명의로 전해 져 내려온 것이 수 십년이 지난 뒤에서야 밝혀지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김 옹은 학성공원 내 일부 면적이 추전 선생의 일을 도와주던 ‘김택명’의 소유주로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택명’은 백부님의 먼 조카벌 되는 이로 나와는 호형하던 사이였지요. 일종의 집사처럼 집안의 온갖 사무를 봐주던 이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말 토지 소유자를 재등록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바뀌게 되었나 봅니다. 지번에 해당하는 곳은 백부님의 거처가 지척에 있고, 백부님이 손수 심은 매화가 만발했던 곳이었지요. 땅 소유는 이미 김택명의 후손으로 상속이 돼 버렸고, 이미 수 십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일이니 그 절차과정을 알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습디다.”

▲ 추전 김홍조 선생.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과적으로 사단은 나고야 말았다. 자신의 땅을 ‘만인들의 낙원’인 공원으로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추전 선생의 의지와는 달리 실소유자로 등록 된 김택명의 후손들은 지난 1990년대 초반 시를 상대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이후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울산공원이 개원한 지 무려 65년이 지난 뒤였다. 심완구 전 시장과 우모씨가 총무국장을 보던 시절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보상절차가 진행되어 그들 일족이 큰 보상금을 받았다는 뒷소문만 무성할 뿐 김 옹으로서는 이를 확인할 길이 막막한 채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말 일본인 고리대부업자에게 돈을 빌린 일족이 있었는데, 그의 보증을 섰던 백부님이 일이 잘못되자 가산의 소유를 사무 보던 이들의 명의로 바꾸셨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지금의 사단이 그때의 일이 잘못되어 벌어진 일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백부님이 생각지도 않게 일찍 돌아가시면서 생겨난 일인 듯도 싶습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라는 것 또한 김 옹의 생각이다. 그러한 것보다는 ‘백부님’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미진한 부분이 많은데다 한말 개혁사상의 선두에 서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선각자에 대한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백부님의 행적 중에는 밝혀진 사실보다 숨겨진 것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조선철강주식회사 준공기념 대표이사 김홍조’라 새겨진 그 시대 놋쇠화로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철광업 등에도 손을 대신 것 같아요. 교육, 금융, 언론, 독립운동에 덧붙여 기업가로도 활동하신 흔적이죠.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어 후세에 제대로 알려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에 덧붙여 김 옹은 “우리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으자니 참으로 힘이 들어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도와주시려는 분 또한 많지만, 100여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뒤라 쉬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엔 지역의 걸출한 인물들이 새로이 빛을 보는 사례가 많던데, 아무쪼록 ‘백부님’을 위한 기념사업회 같은 시민단체가 만들어져 어른에 대한 선양사업을 벌여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지요..”

홍영진기자 [email protected]            자문=박채은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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