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딸기와 초콜릿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쿠바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쿠바 관련 서적도 종종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쿠바를 이상화하거나 비판할 뿐,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쿠바 혁명정부를 대표하며 20세기 세계 영화사에서 최고 감독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딸기와 초콜릿’(1993년)은 현대 쿠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영화이다.

‘딸기와 초콜릿’은 쿠바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1979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는 당시까지 쿠바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인 동성애를 다루었기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으며, 쿠바 내에서 8개월간 상영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또한 쿠바 영화로는 최초로 오스카상 외국어영화 부문 후보로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출시된 적이 없으며, 국내 영화제에서만 상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다비드와 그의 여자 친구 비비안이 싸구려 호텔에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비비안이 남자들은 모두 똑같으며 단지 한 가지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불평을 늘어놓자, 다비드는 결혼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기로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비비안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실연 당한 다비드는 ‘코펠리아’라는 아이스크림 집에서 동성애자인 디에고를 만나고, 디에고는 ‘인형의 집’에서 그가 토르발트 역을 맡았을 때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면서 유혹한다. 다비드는 디에고의 집으로 가고, 그곳이 이상한 조각품들과 예술가들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건물 경비원이자 창녀인 난시를 만난다. 다비드는 디에고의 집에서 새로운 세계와 만나면서, 원래 목적이었던 사진은 받지도 못한 채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온다. 다비드는 친구이자 공산당 청년회의 골수분자인 미겔에게 디에고에 관해 말하고, 미겔은 디에고를 밀고하라고 설득한다.

한편 난시는 팔목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하고, 디에고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이후 디에고는 반혁명적 내용 때문에 전시회가 금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는 헤르만과 심한 말다툼을 벌이고 헤르만은 전시회 조각품들을 모두 부셔버린다. 디에고는 관계 당국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고, 결국 일자리를 잃는다. 영화 후반부에 디에고는 다비드를 점심에 초대하고, 다비드는 난시와 잠을 잔다. 한편 디에고는 쿠바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심한다. 영화는 디에고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다비드와 그가 힘껏 포옹하는 것으로 끝난다.

‘딸기와 초콜릿’에는 쿠바의 정치적·문화적 배경이 드러난다. 교육과 공중보건, 의학과 인종평등 정책이라는 카스트로 체제의 빛이 제시되지만,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라는 어둠도 등장한다. 또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도 드러나 있고, 아프리카의 정령주의와 가톨릭이 혼합된 쿠바 종교 ‘산테리아’도 수시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1960년대에 쿠바혁명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1970년대 초부터 쿠바정부에 등을 돌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도 언급된다.

얼핏 보면 이 작품은 우정이 사회적 편견을 극복한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억압적인 정부 아래서는 개인의 자유가 상실된다는 것을 고발하고, 미겔로 대표되는 정치사상에 함몰된 혁명주의자들의 폐쇄적 국가관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티에레스 알레아는 이런 도식적인 차원을 넘어서 보다 큰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삼는다. 즉, 두 개의 대립적이자 모순적 성향을 모두 포용하면서 보다 넓은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대립적 성향은 이 영화의 두 인물을 통해 제시된다. 다비드는 혁명의 목표를 굳게 믿고, 미국이 쿠바를 삼켜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며, 나머지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상주의자이자 이성애자 대학생이다. 반면에 디에고는 고뇌에 찬 예술가이고, 공산당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외국의 것에 매료되었으며 러시아 소설을

▲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좋아하는 개인주의적인 동성애자이다. 이렇듯 서로 반대되는 디에고와 다비드는 영화의 끝 장면에서 포옹하면서, 서로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며 하나가 된다.

이런 포옹의 의미는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3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1989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1990년대 초) 때문에 쿠바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기 시작하던 때이다.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딸기와 초콜릿’은 1979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냉전 이후 기존의 쿠바 국가 정체성은 변해야 하며, 그것은 모순되는 두 성향의 조화로운 통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했다. 이 영화는 점잖은 유머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런 유머 뒤에서 고뇌에 찬 혁명 지식인 감독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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