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태봉산 태실의 주인 경숙옹주(敬淑翁主)
사연댐 인근 태봉산 정상 이름 없는 태실·비 존재 확인
중앙박물관 소장 태지 명문과 비교한 결과 태비와 일치
내년 시립박물관 개관 때 태비·태항아리 울산

▲ 태봉산 정상에 자리한 경숙옹주 태비. 남구문화원 박채은 소장의 노력으로 태실의 주인이 밝혀지게 됐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이다.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울산에도 조선 왕조의 흔적을 알리는 태비가 있다.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곡연마을 태봉산 정상의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 및 비(碑)’(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가 바로 그 것. 비바람에 낡고 닳은 태비의 가치는 한 향토사가의 숨은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됐다.

◇ 문화재 지정이 되기까지

울산~언양 국도변을 달리다가 사연댐을 지나칠 무렵이면, 도로 오른편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 경숙옹주 태실 및 비’ 알림판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도성의 변방인 울산에 조선 왕실의 흔적인 태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구문화원 박채은 소장이 이 태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1년 가을 무렵. 우연히 문헌을 뒤적이다가 ‘태봉산’의 짧은 기록을 보게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울산시내 공공도서관과 울산대 도서관 등을 수없이 드나들고, 현직 사학과 교수들을 찾아다녀도 태실의 주인은 끝내 찾을 길이 묘연했다.

박 소장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준 것은 <조선의 태실 Ⅰ·Ⅱ·Ⅲ>(1999·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라는 책. 실낱같은 희망의 줄을 따라 이리저리 자료를 더 구하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바로 국립중

▲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채은 소장이 경숙옹주 태실 및 태비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앙박물관 유물관리부였다.

“30여년 전에 도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실의 부장품들이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내용 때문이었지요. 태봉산을 오르내리며 태실과 태비를 조사했을 때, 그 마을 이장이 70년대 전후로 도굴됐다는 내용을 들은 기억이 났지요. 중앙박물관 담당 학예사도 처음엔 알쏭달쏭했던 듯 확인작업만 수차례를 실시했었지요.”

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소장된 유물은 태지 한 점과 태항아리 두 점. 박 소장은 공식채널을 통해 수장 유물의 필름 복제를 즉시 요청했고, 필름을 확대 현상하자마자 태지의 명문(銘文)과 태봉산 현지의 태비 비문(碑文)을 대조했다. 태비 앞면 ‘왕녀합환아기씨태실(王女合歡阿己氏胎室)’과 뒷면 ‘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 문장이 기가막히게 일치했다.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서 비로소 태봉산 태실의 주인을 찾게 된 것이죠. 태실은 조선시대 제9대 임금인 성종 16년(1485년)에 세워졌고, 태실의 주인공은 성종의 딸 경숙옹주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박 소장의 노력 결과 울산시에서는 문화재 지정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고, 1년 여의 기간 끝에 지난 2004년 드디어 울산시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500년이라는 긴 세월에 파묻혀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태실과 태비가 문화재로 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지요. 당시에는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사람들이 나를 보고 ‘태박사’라 부를 정도였지요. 물론 향토사 연구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도 있지만,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보람과 자긍심을 가지게 해 준 유물이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 오히려 참 고맙게 느껴지더이다.”

◇ 태봉산 태실을 찾아서

문화재 지정 이후에도 태실 및 태비에 관한 박 소장의 애정은 계속됐다.

태비가 있는 장소는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는 옛길에 자리한 태봉산 정상. 문화재로 지정은 되었지만, 태비의 위치를 제대로 알리는 방법은 묘연했다. 역사탐방 및 문화재답사가 열풍처럼 번지던 시기인지라 무궁한 이야깃 거리가 되어 줄 옹주의 태실 및 태비에 관한 관심은 높았지만 초행자에게 태비의 위치를 알려주느니 아예 동반해 데리고 다니는 것이 더 쉬울 정도였다.

“지금은 태실과 태비의 위치를 알리는 알림판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데, 이 것 하나 세우기가 참 힘들었어요. 태봉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기껏해야 10분 내외지만, 당시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길이 좁아서 훨씬 더 걸렸지요. 요즘은 일년에 두번 씩 문화재로 이르는 길을 정비하니, 얼마나 수월한 지 몰라요. 아무쪼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태실 및 태비에 담긴 조상들의 정신 문화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랄 뿐 입니다.”

24일 오전 박소장과 함께 오른 태봉산은 낙엽으로 수북했다. 정상에는 태비와 문화재 알림판과 함께 이름모를 오래 된 무덤 한 기가 자리했다.

예로부터 궁가의 태실 주변에는 많은 민간의 태가 묻혀있거나 개인의 무덤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박 소장은 궁가의 태실이 있는 곳인 길지(吉地)에 태를 묻거나 묘를 만들어서 자손들의 가문과 자녀 또한 복을 누리기를 빌었던 흔적이라 유추한다.

“한 가지 바라는 일이 있다면, 내년 6월 울산시립박물관 개관에 즈음하여 중앙박물관 소장품인 태지 및 태항아리들을 울산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합니다. 탄생, 천륜, 기원 등 ‘태(胎)’가 갖는 다양한 의미들을 모아 문화재를 보는 새로운 접근법인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해도 그만입니다.”

글·사진=홍영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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