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1992년에 제작된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은 지금까지 출시된 라틴아메리카 영화중에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이다. 멕시코 전통음식의 세계를 다루는 이 영화는 로맨스와 열정의 세계를 다루면서, 남자의 마음은 여자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무대는 텍사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의 어느 커다란 농장이며, 때는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1910년 무렵이다. 영화는 이 농장의 주인이 자기 둘째딸이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라가르사’ 농장의 여주인 마마 엘레나는 딸을 낳는데, 그 아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티타이다. 그녀는 향신료와 음식이 가득 널린 주방 테이블 위에서 태어난다. 이후 티타는 이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요리사 나차를 통해 음식에 숨겨진 마법을 배우면서 집안의 훌륭한 요리사로 자란다.

티타는 ‘라가르사’ 집안의 막내딸이다. 그 위로는 로사우라와 헤르투르디스라는 언니가 있다. 막내딸인 티타는 멕시코 상류사회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그때까지 결혼할 수 없다. 세월은 흘러 티타는 결혼할 나이가 되고, 페드로라는 마을 청년의 청혼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할 수 없는 몸이기에, 페드로는 로사우라와 결혼하면서 티타와 같은 집에 사는 방법을 택한다.

티타는 결혼 케이크를 준비하면서 음식이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식 전날, 티타는 케이크 반죽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그 케이크를 먹은 하객들은 마법에 걸린 듯이 모두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급기야는 음식을 토한다. 그리고 그날 요리사 나차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녀의 영혼은 계속 티타의 주변을 맴돌면서 요리의 비법을 전수한다.

그로부터 1년 후, 페드로가 그동안 부엌을 맡아주어 고맙다면서 티타에게 장미 한 다발을 선사한다. 장미 가시가 가슴을 할퀴지만 그녀는 그걸 페드로의 달콤한 애무로 여긴다. 그날 저녁, 티타는 나차의 영혼이 시킨대로 장미꽃잎으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대접한다. 티타의 사랑이 가득 담긴 요리를 먹은 페드로는 천상의 음식이라고 극찬하지만, 마마 엘레나와 로사우라의 반응은 냉랭하다. 또한 그 음식은 헤르투르디스에게도 마법을 걸고, 그녀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곳을 습격한 혁명군 대장과 함께 말을 타고 도망친다.

이후 티타와 존 박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리고 어느 날 마마 엘레나는 세상을 떠나고 로사우라는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존 박사의 아들과 로사우라의 딸이 결혼하는 날, 티타와 페드로는 평생 처음으로 단 둘이 밤을 보낸다. 그날 밤 페드로는 티타와 사랑하다가 죽고, 티타와 농장가옥은 불타 잿더미로 변한다.

겉으로 보면 로맨틱 코미디 같지만, 이 영화는 음식의 성적 상징을 통해 상상적 성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말 제목은 은은하고 낭만적인 밸런타인데이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작품의 원제목은 ‘초콜릿에 타는 물처럼’이다. 이는 멕시코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성적 상징은 장미꽃잎, 메추리, 피망, 양파 등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창녀, 마녀, 어머니로 구분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여성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여성인물은 하나의 원형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차례 변화를 겪는다. 우선 여자 가장인 마마 엘레나는 어머니의 원형을 보여준다. 외견적으로 그녀는 점잔을 빼며 엄하기 그지없으며 전통을 중시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고, 그 결과 헤르투르디스가 태어나면서, 그녀의 겉모습은 위선임이 밝혀진다. 한편 티타는 언니의 남편인 페드로를 사랑하면서 창녀의 원형을 보여주지만, 언니의 아이를 유모처럼 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며, 동시에 어머니라는 원형에 저항하기도 한다

▲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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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는 부엌과 음식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부엌과 음식이란 여자들이 박차고 나와야 할 장소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엌이라는 공간이 여성해방의 장소가 된다. 그들이 가슴으로 만든 음식을 내오면, 그들을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노예로 다루는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 즉, 음식을 만드는 것이 여성의 자아희생이 아니며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티타는 부엌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보고, 부엌에 의지하여 권력구조를 거부한다. 이것은 부엌이 소외된 여성의 담론을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소가 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부엌이라는 공간을 다시 정의하고, 그것을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의 영역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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