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추카

2004년에 칠레에서 개봉되었고 올해 11월에 우리나라에 DVD로 출시된 안드레스 우드의 ‘마추카’는 보고타 영화제, 아바네 영화제, 비냐 델 마르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두 아이의 우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칠레 아옌데 정부의 마지막 기간에 일어난 사회계급 간의 극심한 충돌과 피노체트 군사정권 초기의 무자비한 탄압을 잘 보여준다.

‘마추카’는 열한 살된 두 아이의 우정을 통해 1973년 당시의 칠레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곤살로 인판테는 상류층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엔 관리이며, “사회주의는 칠레에게 좋은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고자 한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한다. 곤살로의 가족은 행복하지 않으며, 항상 집안에서 서로 충돌한다. 이렇게 그의 가족은 칠레 사회의 긴장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페드로 마추카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힘들게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하층민이다.

두 아이는 세인트 패트릭 학교에서 만난다. 이 학교는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가톨릭 학교지만, 교장 맥켄로 신부는 아옌데 정권이 추구하는 사회통합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까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던 페드로 같은 가난한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도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런 학교 정책 덕분에 두 아이의 우정이 탄생하고, 그들은 서로 모르던 세계를 발견한다.

페드로는 다양한 음식과 아디다스 신발을 신는 상류층의 삶을 알게 된다. 반면에 곤살로는 매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면서 아옌데 대통령을 지지하는 피지배층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어느 날 곤살로는 마추카의 여자 사촌인 실바나를 알게 된다. 이후 곤살로는 페드로와 실바나의 불법 판자촌을 자주 찾아가게 되고, 오염된 강변에서 실바나는 두 아이들을 성의 세계로 안내한다.

두 아이가 알게 되는 이런 모든 새로운 경험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린다. 아옌데 대통령은 죽고, 군인들은 학교로 들어와 아옌데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던 맥켄로 교장 신부를 다른 신부로 교체한다. 그들은 불법 판자촌도 파괴한다. 그리고 군인들의 폭력에서 아버지를 지키려던 실바나는 총에 맞아 죽는다. 한편 곤살로의 아버지는 유럽으로 떠나고, 그의 어머니는 정부의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곤살로는 가정부와 함께 앉아서 쿠데타 직후의 모습을 흑백 텔레비전으로 지켜본다.

이 영화에서 곤살로와 페드로의 성(姓)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인판테는 ‘왕자’ 혹은 ‘어린아이’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적 특권 계층이며 순수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마추카’는 귀찮은 사람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로, 사회적·물리적으로 성가신 존재, 즉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짓이기다’나 ‘상처를 입히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는 페드로보다는 곤살로에게 많이 할애되어 있지만, 왜 이 영화의 제목은 ‘인판테’가 아니라 ‘마추카’일까? 아마도 안드레스 우드 감독은 칠레 국민은 17년에 걸쳐 군사독재에 의해 짓이겨졌고 상처를 입었으며, 자기는 가난한 피지배층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마추카’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통해 양극단의 세계가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철저하게 양분되어 있다. 특히 공간을 통해 이런 사회적 현실이 제시된다. 다시 말하면, 부유한 집의 내부와 가난한 동네의 외부는 각각 사회계층과 세상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곤살로의 가족은 집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인 것에 중점을 둔다. 반면에 페드로의 집은 허름하기 때문에 ‘밖’에서 보내야만 한다.

또한 벽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에서는 곤살로가 페드로의 동네로 가는 길에

▲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있는 벽에 적힌 커다란 글자가 세 번 나타나는데, 그럴 때마다 그것은 사회적 충돌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암시한다. 처음에는 ‘내전 반대’라는 글자가 나타나지만, 두 번째에는 ‘반대’라는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그리고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이런 문구가 완전히 지워진 채 벽은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렇게 벽은 군부 쿠데타 이후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없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추카’는 칠레의 상황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지배층의 어느 여자가 “왜 사과와 배를 섞나요?”라고 질문하면서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통합에 반대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1970년대의 칠레처럼 양극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배-피지배, 진보-보수로 나뉘어 서로 상대방에게 적개심만을 축적하는 대신,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상생과 소통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