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열 채가량 있는 작은 동네

▲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한자교육국민운동 대표
도읍의 읍(邑)은 ‘고을’을 가리키는 한자입니다. 도회보다는 작고 마을보다는 큰 곳이 읍입니다. 이 글자는 口와 巴가 합한 형태입니다. 口는 사방을 둘러싼 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巴는 사람을 뜻하는 부호입니다. 곧 일정한 테두리 안에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읍(邑)입니다.

어린 시절 읍내(邑內)에 산다고 하거나, 읍(邑)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우러러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양복이라도 차려 입은 사람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었습니다. 말끔한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있던 농업학교를 다닌 선배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50년대만 해도 고등학생은 많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던 그 선배를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인상이 깊었던 탓이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자란 고장은 울산읍에서도 한참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울산읍이라야 고작 3만을 헤아리는 인구였지만, 읍에서 30리가 떨어진 변두리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자주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전쟁 직후 50년대 초반에는 그랬습니다.

당시에도 축구 경기는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군대항 축구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날은 우리도 자유롭게 읍에 가곤 했습니다. 교통편이 열악한지라 그 먼 길을 걸어 가야 했습니다. 지금 울산공항이 된 그 긴 둑방길은 매우 인상적이었지요. 농소에서 병영으로 이어진 이 둑방길은 동천강의 물줄기를 따라 일직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울산군 전체의 초등학교가 참여하는 축구대회는 각 학교의 명예가 걸린 경기였습니다. 그 때 보았던 읍 소재 학생들의 도회풍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세련된 교복을 입고, 짝을 지어 다니면서 응원을 하던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우승은 항상 교세가 큰 읍 소재 학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읍장(邑長)은 고을의 어른이요, 인품이 높은 덕자(德者)로 모두가 우러르고 높였습니다. 읍이 들어가는 말로 식읍(食邑)도 있고 십실지읍(十室之邑)도 있습니다. 식읍은 제후에게 세금을 받으라고 하사한 읍이고 십실지읍은 작은 고을을 말합니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한자교육국민운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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