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지키지 못할 ‘공천폐지’ 공약
정치쇄신 약속만 유야무야 아쉬움 커
정책·비전으로 정당정치 바로세워야

▲ 정명숙 편집국장

정치가 가장 문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경제분야나 문화예술 또는 스포츠에서 세계 최고란 타이틀을 획득할 땐, 수준 낮은 정치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커진다. 정치만 잘하면 정말 좋은 나라가 될 것도 같은데…. 언제쯤 제대로 될까. 특히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이 하나같이 비슷하다는 점은 거의 불가사의다. 조금이라도 손해다 싶으면 정당을 가리지 않고 천박한 말싸움에 몸싸움까지 서슴지 않다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일제히 ‘파리 잡아 먹은 뚜꺼비’마냥 눈만 껌벅껌벅한다. 최근 ‘기초선거 공천 폐지’ 논란에서도 그랬다.

지난 대선 때 여야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기초선거 공천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옳은 일인지, 가능한 일인지 검증도 없이. 아마도 의원연금이나 각종 특권을 내려놓는 등 획기적 정치쇄신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입막음용으로 ‘딱이다’ 싶었던 모양이다. 워낙에 공천폐해를 경험했던 시민들도 꽤나 그럴듯해보이는 제안에 결과적으로 속고 말았다.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공천폐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쇄신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아쉽기 이를데 없다.

사실은 뻔한 결과를 두고 정치권의 논란은 예상 외에 진지하고 오래 끌었다. 많은 국민들이, 심지어 정치권 내에서도 ‘공천폐지’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마치 그것이 정의인양 한목소리를 냈다. 가장 먼저 모르쇠를 한 건 대통령이다. 자연스럽게 공은 새누리당쪽으로 넘어 갔다. 여야가 모여 위원회까지 만들어 ‘논란을 위한 논란’을 거듭했다. 6·4지방선거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새누리당은 ‘상향식 공천’이라는 ‘포장 상품’을 슬쩍 밀어넣으며 꼬리자르기를 했다. 유감스럽게도 공약철회에 대한 엄중한 사과는 없었다. 민주당의 미련은 새누리당보다 길었다. ‘새정치=공천폐지’라는 상품을 내걸고 새정치연합과 합당의 길로 들어서는 촉매제로 삼았다. 결과적으론 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고 말았으니 미련둥이가 따로 없다. 그밖의 진보정당들은 공천을 주장했으나 자칫 새누리당과 의견을 같이 하는 모양새가 될까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묻어갔다.

애초에 터질 것으로 알고 하늘높이 올려보낸 풍선 같았던 이번 공천폐지론은 우리나라 정당정치 역사에서 결코 가볍게 취급돼서는 안될 사안이다. 왜냐하면 ‘공천폐지’는 단순히 기초공천을 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정치의 근간을 정당인 스스로가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치인은 “정당정치의 핵심 중 하나가 공천권인데 제살을 깎다가 제팔을 자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광역·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 모두 정당정치라는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이라면 정당을 통해 이념과 신념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공연히 제도 탓만 했다. 문제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 바로 그들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회 내 한 공부모임에서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는 핵심은 정당을 아주 혹독하고 부정적, 비판적으로 보는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정당에 대해 상당한 오해와 인식이 작용했고 제도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이 압박을 당해 정당을 강화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제도가 작용해왔다”고 공천폐지론이 등장한 이유를 분석했다. 우리 국민 상당수는 정당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다. 대의제민주주의를 채택한 우리나라에서 정당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지만 우리 정당의 체질과 운영은 비민주적이고 비능률적이며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시키는 매개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당이 비전과 정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두 인물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공천폐지 논란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 우리 국민들이 공천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됐고, 정당정치에 대한 공부도 적잖이 했다는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폐지 설문조사’에서 일반시민 49.75%나 정당공천을 찬성한 사실이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비로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당, 정책과 비전으로 존재하는 정당이 아니면 정권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6·4지방선거에 나서는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정명숙 편집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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