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월호 사태까지 모든 한국의 참사
짬짜미에 길든 사회의 이중적 사고 때문
상황에 따라 합리화 하는 모습 사라져야

▲ 이태철 논설실장

우리 사회를 통곡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세월호 참사’. 세상에 또 이런 비극이 있을까 싶지만은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면 처음은 아니다. 1970년 4월8일, 33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를 낸 서울 마포구 창천동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위시해 1971년 대연각 호텔 화재(168명 사망 68명 부상), 1977년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59명 사망, 130명 중경상), 1993년 10월10일 서해훼리호 침몰사고(292명 사망),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사망 32명, 부상 17명),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 1995년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사상자 220명), 1997년 대한항공기 추락(사망 229명, 부상 25명),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사망 192, 부상 148명)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찰 대형사고가 그 때마다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40명의 사망자를 낸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고가 그랬고, 가장 최근인 지난 2월17일 신입생환영회 행사중이던 대학생 10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105명의 부상자를 낸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총체적인 안전불감증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며 구조·구난체계에도 많은 의문점을 갖게 했다.

또 짬짜미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의 이중적 사고가 만들어 낸 비극이라는 한결같은 결론에 사회적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관계, 재계는 물론이고 시민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해관계에 따라 더없이 굳건한 결속력을 보여온 짬짜미(담합)가 기본원칙을 흔들고, 법과 제도까지 무력화시켜왔지만 그 때뿐이었다.

세월호 참사도 다르지 않다. 관료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공공기관과 선박회사의 짬짜미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로 대한민국이 여전히 권력과 인맥의 중심이 ‘관료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다. 승객구조를 외면한 선장과 선원의 뒤에는 돈벌이에 급급한 부실한 회사가 있었고, 그 것을 뒷받침한 것이 관료사회였기 때문이다.

건조된지 20년이 지난 선박을 들여와 여객선으로 꾸며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과정만 해도 그렇다. ‘누이좋고, 매부 좋고’식의 짬짜미만 있었지, 그 어느곳에서도 법의 엄정함이나 공직자의 사명감은 찾아 보기 힘들 지경이다.

“내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이 두가지 상반된 욕망이 나를 이중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점잖은 학자인척 했지만 속으로는 주위의 나약한 자들을 비웃으며 그들에게 침을 뱉고, 저주를 퍼붓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도달했을때에는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나는 뛰어난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대목처럼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중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악마적 성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잘못된 일인지 알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편리하게 해석해 버리는,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합리화시키는 짬짜미가 용인되는 한 올바른 선택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도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만을 믿고 따랐던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기성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분향소를 찾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사회적 반성을 촉구하는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 둘,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다. 그토록 서슬퍼렇게 외쳤던 철저한 원인규명과 특별대책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물러질 것이다. 국무총리가 사퇴하고, 일부 책임있는 부처의 장관이나 관료가 경질되는 선에서 정부의 책임은 매듭지워질 것이다. 사고당사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물론이거니와 일부 짬짜미의 책임을 물어 약간의 제도도 손질될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른 ‘세월호 참사’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재연하게 될 지도 모른다. 질기디 질긴 짬짜미의 생명력에 더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이태철 논설실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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