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예감

▲ <울음소리의 메아리> 캔버스위, 130×100㎝, 1937년작, 멕시코시티 근대미술관.

그림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시를 읽으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중년여성들이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이들은 TV속에 악당이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면 분노를 느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모두가 작품을 감상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감성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예술적인 감동은 목적의식 없이 순수해야 높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감상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가령 어떤 사람이 비어있는 아파트거실의 벽면을 그림으로 장식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거나 혹은 작품수집가가 투자의 목적으로 작품을 구매한다면 이러한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계산적인 목적의식에 의해 감성적인 현상이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계산된 목적의식이 순수한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들은 어떨까? 작품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을 할 수 있으며 청탁과 주문에 의해 제작을 할 수도 있다. 상업화와 종교화가 그렇다. 그러나 주문자의 의도와 목적이 그들의 작품제작에 큰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이러한 목적과 기능을 가진 작품의 제작방식은 자유로운 구상과 독창성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주문자의 목적과 취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예술철학에 근거하여 작품을 창작한다. 때문에 그들은 철학적이면서도 개념적이다. 작품의 판매나 작가로서의 성공도 염두에 두지만 후차적인 문제이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창작태도는 왜 이러한 모습을 가질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와 판단은 비록 고전적이지만 칸트로부터 정리되기 시작한다. 그의 ‘무관심성’에 대한 논거이다. 무목적적인 무관심한 경험과 판단에 의한 제작과 감상은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의미한다.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예술(Fine art)이다.  

▲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예시된 작품을 바라보자. 제목이나 작가가 누구인지, 그림에 대한 정보나 선입견도 없이 무관심한 듯이 혹은 우연히 보듯이 바라보자. 그림은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흑인아이가 몹시 낡은 천을 두르고 혼자 울고 있으며 뒤의 큰 얼굴은 우는 아이의 형상을 강조한 듯 보인다. 아이를 둘러싼 화면의 배경은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것 없이 파괴되어 있다. 그리고 먼 하늘과 땅과 화면은 모두 회색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을 구성하는 이러한 명료한 정황이 우리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우리의 감정은 곧장 우울해 지거나 혹은 슬픈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곧 우리가 가진 시지각적 인식이다. 이러한 시지각은 순식간에 자신의 경험과 만나서 개념화되고 철학화 된다.

전쟁을 겪었거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자신의 어린모습과 겹쳐 참담한 모습을 연상하고 슬퍼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평화라는 철학적인 의식의 단계에 진입한다. 모두 기능적인 목적이 없기에 수준 높은 감동이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경험을 한 이후에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라는 작가의 특성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자. 그의 순수한 예술철학을 만날 것이다.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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