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학 울산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1. 철학, 과학, 예술, 디자인, 실험

철학자 이정우 선생은 그의 저서 ‘접힘과 펼쳐짐’에서 철학의 역할은 과학이 당대까지 이루어 놓은 성과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아직 과학적 탐구가 나아가지 못한 영역을 상상력을 통해 점선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철학과 단절된 과학은 기술과 자본의 하수인일 뿐이고, 과학과 단절된 철학은 황당한 사변이나 고급 수필일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대한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2. 경험을 제공하는 미학

“새로운 것은 이제 하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프랑스의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그의 책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에서 이렇게 언급하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시각예술에서 보여 온 미학의 키워드를 ‘관계’로 살펴보고 있다. 요컨대 시각예술 작품은 이제 더는 어떤 절대적 기원이나 가치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미적 추구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일종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그것이 놓이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관객과 유동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미적 가치는 예술가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성의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주체, 일상, 민주적 디자인 생산과 소비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며 형태, 색채, 소재 등으로 일상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집 내부를 장식하는 일, 마당에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뜨개질 하는 일,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 등 일상의 모든 일이 계획하고 만드는 디자인 결과다. 이렇듯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일상에서 디자인의 실천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본과 과학 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디자인을 일상으로부터 분리됐다. 디자인 생산은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고, 디자인 소비는 일률적으로 획일화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주체는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자급자족을 위한 디자인, 빈곤을 해결하는 디자인,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디자인, 오래 쓰는 디자인, 다시 쓰는 디자인. 이것들이 디자인이 지금껏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이다.

안병학 울산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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