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예술과 삶 -연재를 마치며

▲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44×37㎝, 1887년작, 반 고흐 미술관.

2010년 10월에 시작된 ‘이야기로 읽는 세계명화’의 글을 마감하려 한다. 그동안 88회를 진행하였고 4년에 가까운 긴 시간이 흘렀다. 격주로 진행된 글은 바쁜 일상으로 가끔은 시간을 놓치기도 하였으며 내용이 빈약했던 글들도 많았음을 느낀다.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읽어주신 독자님들과,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독자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니 부족한 점을 헤아려 주시길 바랄 뿐이다. 또한 필자에게 기꺼이 지면을 할애한 경상일보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모두가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라 여기고 싶다.

필자가 쓴 글의 내용은 대부분 ‘예술과 삶’이라는 화두였으며 가능한 미학적 관점에서 작성을 하고자 하였다. 주로 현대적인 담론을 내용으로 삼고자 했으며 르네상스기를 비롯한 근대미술도 이러한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작품이 가진 내용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적 삶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성찰하여 앞날의 삶을 디자인하는 재료로서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우리는 왜 예술작품을 감상할까? 아름다운 그림이나 시와 같은 것을 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없는 향수에 젖기도 하고 오래전의 일들이 불현듯 생각나서 감성에 젖기도 한다. 때로는 쾌감을 느끼기도 하며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이러한 감성적인 희노애락의 감정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지만 결코 논리적으로 해석을 하거나 이해를 하기 힘들다. 논리의 한계를 넘어 통합적인 감정논리가 만든 감성적 메타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지 않은 생활은 딱딱한 논리구조에 구속되는 것이며 부드럽고 유연한 정신을 놓치게 되어 창조적인 삶을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동안의 글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두 가지의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하나는 화가로서의 확고한 직업관을 갖고 쉼 없이 창작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화가도 여타의 직업과 같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며 지적인 전문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직업의 특수성에 의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며 이와 관련하여 작품의 변화에도 매우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수준 높은 형식적 창작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지적인 내용의 창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두 번째는 매우 다양한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는 것이다. 화가로서 붓으로 캔버스 위에 그리는 그림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미술영역을 폭넓게 실험하며 때로는 타 장르까지 넘나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무대미술, 의상디자인, 건축디자인, 공공미술, 관련사업, 평론 등 다양한 영역으로의 확장과 함께 영화와 음악, 사진 등으로 확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창작의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미술작품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을 예술이라는 상위개념으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술의 통섭현상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작품과 같기를 바라며 또한 이왕이면 명작이 되기를 바란다. 글을 마치며 고흐의 인생을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명작일까? 신산고초를 넘어 완성되는 고흐의 자화상을 고요하게 본다면 그가 조용히 답을 줄 것이라 여긴다.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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