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학 울산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우리는 매일 글자를 접한다. 아침에 눈을 떠 처음 접하는 조간신문, 출근 후 열어 보는 이메일, 업무 중에 작성하는 각종 보고서, 점심 후 들여다보는 잡지, 친구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 길거리의 표지판, 저녁 식사 자리의 메뉴판, 퇴근 후 받아 본 각종 우편물, 공과금 지로 용지, 영화의 자막, 그리고 각종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책. 이처럼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글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대한 양의 글을 통해 하루도 빠짐없이 가늘거나 굵은, 크거나 작은, 바로 서거나 기울어진, 평범하거나 온갖 별난 모양의 글자를 접한다.

그런데 이처럼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글자를 접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 1면 머릿기사의 제목 글자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침 출근길에 올라탄 버스의 번호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글자를 통해 의미와 정보를 인지하지만, 글자의 자세한 모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인간의 지각, 인지, 기억의 과정은 평소와 다른 특별한 사건은 기억에 새기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험은 단기 기억 속에 저장한 후 곧바로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매일 아침 읽는 신문의 글꼴이 바뀌면 그 영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새롭고 신선함에 구독률이 폭발적으로 늘기도 하고 반대로 익숙하지 않아서 느끼는 불편함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구독률이 급락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독자가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글자꼴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정도의 형태적 인지는 못하지만, 글자의 형태가 독자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성격, 독서 흐름, 지면의 분위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면이 보기 좋다든가, 왠지 읽기 편안하다든가, 뭔가 복잡한 느낌이라든가, 불편해 보인다든가 하는 식의 주로 추상적 경험으로 나타난다.

곧 한글날이 다시 다가온다. 세계에서 가장 어린 문자, 유일하게 글자를 만든 이의 이름이 알려진 문자. 이제 한글의 글자꼴 선택의 폭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 남았다.

안병학 울산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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