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무릎이 꿇리고 압슬형을 당했으나 박어둔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먼저 방금령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남구만 어사의 명에 의해 울릉도 조사를 나갔을 따름이고, 이후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울릉도를 되찾고 그것을 일본 막부장군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아 왔습니다.”

“네 놈이 임의로 배를 타고 울릉도로 나가 그곳에서 불법적으로 일본으로 도해하고도 방금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네 놈 따위가 어떻게 일본 막부의 도쿠가와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것도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아 왔단 말인가.”

“그들에게 영토문제를 들고 온 외국인은 흔치 않습니다. 도쿠가와가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이 놈아.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는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은 여기선 통하지 않는다. 네 놈들의 세세한 행적을 에도 막부로부터 받은 게 바로 이것이다. 읽어나 보아라!”

동래부사는 초량관수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던져주었다.

박어둔은 일본으로부터 온 행장기를 보았다. 일부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 짜깁기한 것으로 홍소를 금치 못했다.

겐로쿠(元祿) 5년(1692년) 2월 요나고 어민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양씨들이 하쿠슈(伯州)의 요나고를 출선하여, 17일 오후 2시 무렵에 죽도 내의 항구에 도착해본즉, 전과 달리 섬에 집과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죽도에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집단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해조류와 고기를 말리고 있었고, 어막들이 여러 채 지어져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주변을 보았더니, 조선인 수십 인이 농사와 어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방금을 어기고 죽도로 온 어민과 유민들로 어떤 때는 해적으로 변해 우리 일본 배와 어민들을 공격한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에 통역 한 사람과 두목인 듯한 사람 한 사람, 두 사람을 태우고 귀환했는데 둘의 이름은 안용복, 박어둔이었다.

작년에도 이 섬에 외국인들이 있었으므로, 거듭 이 섬에 건너와서 어렵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나무라면서 여러 번 말했는데도, 금년에도 태연하게 외국인이 어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명을 연행한 것이다.

오키의 번소(番所, 치안 및 징세를 담당하는 곳)에서 두 외국인의 구상서(口上書, 현안을 기록한 외교 문서)를 받으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촌장[庄屋]들이 입회하여 다시는 죽도에 출입하지 않겠다는 구상서를 써서 날인을 하게 하려고 했지만, 둘은 거절하여 날인하지 않았다. 그 후에 번소에서 술 한 통을 보내 먹인 뒤 다시 날인하게 했으나 역시 강하게 거절하고 오히려 막부 장군을 만나게 해달라는 등 엉뚱한 소리를 하므로 영주인 마츠타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郞)에게 이 둘을 정식으로 제소하였다. 영주는 이들을 조사한 뒤 막부에 보고했고, 막부에서는 조선에 송환하라고 명령했다. 막부의 송환 명령에 따라 이 둘을 히젠국 나가사키로 보냈고, 그곳에서 이들을 나 대마도주 소 요시츠구(宗 義倫)에게 건네주었다. 이에 나 요시츠구는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조선국에 송환하였다.

박어둔, 안용복 두 사람은 스스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항해하고 왔다고 하며 죽도의 태수와 양도감세관으로 사칭하고 있는 바, 귀국에서 확인해 주길 바라고 다시는 일본 해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 주길 바란다.

대마도주 소 요시츠구(宗 義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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