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박어둔은 좌의정 남구만의 울릉도와 자산도(독도)를 위한 변론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남구만 어사의 명으로 시작한 울릉도의 쇄환과 탐사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남구만 어사가 당시 울진현감인 자신에게 지어준 시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박어둔은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울릉도와 자산도(독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남구만 어사로부터 울릉도 수토와 탐사의 명령을 받고 울산호로 출항을 한 것이 바다생활의 첫 계기가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과 일본을 떠돌며 어느덧 3년의 해상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남구만의 변론은 계속 이어졌다.

“마마, 박어둔은 저의 명에 의해 울릉도 남항과 서항에 불법으로 막사를 짓고 어채(魚採)를 하는 왜인들을 토벌하고, 울릉도에 들어가 울릉도 섬 일대를 조사했습니다. 저는 삼년 전 박어둔이 울릉도에 가서 탐사한 결과를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준비해온 두루마리를 펴서 읽었다.

‘울릉도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섬입니다. 물고기와 전복이 풍부하고, 대나무와 인삼이 잘 자라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선조정의 엄격한 방금(防禁)에도 불구하고 삼척, 울진, 울산, 동래, 견내량(거제), 거문도, 진도 등 동남해 사람들이 울릉도 서항에 막사를 짓고 활발한 어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부역이나 지은 죄를 피하기 위해 육지에서 도망친 자들이나 대부분은 고기를 잡는 해척과 선량한 양민들입니다. 그러므로 두 섬에 대한 방금을 풀고 세종대왕이 실시한 사민정책을 펼쳐 육지의 사람을 그곳에 이주시켜야 합니다.

국방의 용도로 봐서도 우산도와 자산도는 동해의 한가운데 있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의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습니다. 청컨대 육지에서 인민을 모집하여 섬을 채우고, 그곳에 만호와 수령을 두게 되면 왜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며 실로 조선의 동쪽을 안전하게 지키는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남구만은 박어둔이 울릉도를 탐사하고 작성한 두루마리 보고서를 읽은 뒤 숙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박어둔과 안용복은 그냥 단순한 해척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왕토와 국방을 지키려 한 충신보국의 인물입니다. 이들을 죄인으로 다루기보다 오히려 상을 주고 격려해야 할 자로 생각하옵니다.”

그러자 영의정 민암이 목소리를 높였다.

“상감마마, 아니 되옵니다. 대명률이 엄연히 살아 있는 한 저 둘은 대역죄인입니다. 더욱이 단순한 해척인 주제에 함부로 태수와 감세관으로 사칭하고 일본으로 무단 도해하여 국기를 문란케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엄히 다스려 다시는 이런 무리들이 일어나 바다의 질서를 문란케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숙종은 이제 장희빈 일족인 민암에 대해서도 염오를 느꼈다. 그는 새로운 환국(換局,정국을 바꿈)을 작정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