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숙종이 박어둔에게 말했다.

“승지로부터 듣자하니 박어둔 너는 아시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는 데 사실인가?”

“그러하옵니다. 울산사람과 견내량, 완도사람 등 40여명과 울산호를 타고서 아시아항로를 지나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유럽의 해양강국인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이 아시아에 들어와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문호를 열고 그들 나라와 교역해 부를 쌓은 것도 보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아직 미개한 땅이지만 그곳에서도 문호를 열어 항구마다 활발한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어둔은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사관이 자신의 말을 받아 적고 있으므로 자신이 죽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말은 기록으로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

“상감마마, 유럽은 신식무기를 개발하고 배를 많이 건조하여 적극적으로 해외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신대륙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시장을 개척하고 식민지를 획득하여 막대한 부를 쌓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는 무역을 중시하는 중상주의적 정책을 사용해 서로 경쟁하며 바다 밖으로 진출해 풍부한 자원을 가져와 국내산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신흥강국인 영국은 기술을 혁신하여 석탄 산업과 의류 산업을 왕성하게 일으켜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전 세계는 바다의 관문을 활짝 열고 자유로운 해양교류를 통해 서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나가사키에 데지마 상관을 열어놓고 유럽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만이 방금령을 내려 해외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우리나라는 고립될 뿐입니다.”

그러자 영의정 민암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꾸짖었다.

“네 이놈, 역적이 따로 없구나. 우리 조선과 조정의 정책을 능멸하다니! 조상의 전통과 조종의 도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삿되고 더러운 양이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숙종이 장희빈의 척족 민암에게 환멸을 느끼는 듯 말했다.

“영의정은 입을 다물라. 그래, 그렇다면 우리 조선은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냐?”

박어둔은 형형한 눈빛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조선은 머리는 대륙을 이고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작은 듯 하지만 매우 큰 땅을 가진 나라입니다. 먼저 대왕께서 위대하신 세종대왕처럼 영토의 경계를 확정지으셔야 나라가 안정됩니다.”

“영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북방대륙은 만주가 우리 땅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을 따라 오호츠크해까지 모두 우리 영토입니다. 하루빨리 중국과 협상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셔야 합니다.”

죄인을 국문하고 있는 숙종은 어느덧 박어둔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되었다. 오랜 해외경험과 견문, 통찰력에서 나오는 박어둔의 말은 수구 대신들의 말과는 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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