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박어둔과 안용복은 경옥(京獄)에서 석방되어 다시 울릉도로 들어갔다. 조정의 당파 싸움과 민씨 척족들의 반대로 박어둔과 안용복이 양도 태수와 감세관으로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했지만 숙종은 둘의 외교업적을 인정하여 실질적으로 울릉도를 통치하게 했다. 숙종은 박어둔과 안용복의 외교력과 진언에 힘입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확정짓고, 북방으로는 함경감사 이선부를 보내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중국과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박어둔의 생애는 공식문서보다 민간행장으로 더 잘 드러나 있다. 울산 박씨 종가에서 내려오는 그의 행장기는 간단하지만 조선의 바다를 넘어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바다의 제왕임을 증언하고 있다.

해제(海帝) 박어둔 행장기

박어둔(朴於屯)은 1661년 울주군 청량면 목도리에서 부 박기산과 모 윤보향 사이에 외아들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태몽은 귀신고래였고 아명은 업둔(於叱屯)이다. 박기산의 부 박국생은 정3품 통정대부이고, 조부 박잉석은 종2품 가선대부, 증조부 박염훈은 정2품 정헌대부로 대대로 당상관 벼슬을 한 집안이었다. 증조부 박염훈 대에 울산 마채염전을 개발해 부를 축적했고, 조부 박잉석은 삼산들 전답을 사들이고 종갓집 청람당을 지었으며, 부 조국생에 이르러 옥동 공방, 웅촌 목장, 개운포 여각, 범서 목재를 더해 여섯 장원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종인 천막개의 고변으로 경주 박씨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적몰되었고 아버지는 해외로 망명했고, 어머니는 종의 신분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박어둔은 고변자 천막개의 업둥이로 들어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울산의 유림 이휴정 이동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대과에 합격하여 울진현감과 울릉도와 자산도 양도 태수를 역임하였다.

울진현감 재임 시 남구만 어사의 명을 받아 안용복을 비롯해 울산과 동래, 견내량과 진도 사람 40여 명을 울산호에 태우고 울릉도와 자산도를 탐사했고, 왜적을 소탕해 양도를 조선의 땅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삼복지변에 연루되어 조선을 떠나 배로 유랑생활을 하다 아버지의 족적을 찾아 부하 40명과 함께 일본, 대만, 중국, 비율빈, 안남, 인도, 아불리가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부친 박기산과 상봉했고, 해상무역과 주식투자로 큰돈을 벌어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세례를 받고 울릉도와 자산도로 귀국했다.

그는 이후 계속되는 왜적의 양도 침입을 막기 위해 안용복과 더불어 수차례 일본으로 도해하여 막부 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담판하여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자산도 도해를 금하는 금제를 받아내 마침내 울릉도와 자산도를 조선의 땅으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일본의 농간으로 조선에 죄인으로 압송되어 경옥에 구금되었으나 숙종의 사면을 받아 정식으로 울릉도의 태수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울릉도와 자산도를 거점으로 동북아의 바다에서 활약했다. 그는 울릉도 남항에 선소를 짓고 울산호 울릉호 자산호 등을 건조하여 그 배를 타고 멀리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나가 어로와 무역에 종사했으며, 말년에는 아메리카 신대륙과 대서양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 교황을 알현하고 조선으로 귀국해 세계 일주를 했으니 사람들은 그를 외경하여 바다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1720년 60세 나이로 몰했다. 그의 생애는 우연하게도 조선의 임금 숙종의 생애와 똑 같았는데, 사람들은 육지의 임금이 숙종이라면 바다의 임금은 박어둔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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