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흔히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고 한다.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에 걸맞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격에 어울린다는 뜻이다. 여름에는 장마와 더위가 있어야 부채가 제 노릇을 하고, 겨울에는 눈과 추위가 있어야 동장군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여름의 난로와 겨울의 부채가 가당하기나 한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추위가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추위를 뜻하는 ‘한(寒)’자는 그 앞에 ‘엄(嚴)·냉(冷)·혹(酷)·심(甚)’ 등의 글자가 놓여서 읽은 사람에게 전율을 느끼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주위에는 심신을 시리게 하는 엄혹한 일이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소한(小寒)을 지난 1월10일에는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거주민은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 혹한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한겨울의 힘센 바람이 아주 꽁꽁 얼어붙게 하는데
초가 속에 누운 여윈 몸은 병이 점차 더해지네.
어찌하면 큰 대지에 따뜻한 봄기운이 불도록 하여
원기가 뾰족한 새싹을 두루 적시도록 할까?

仲冬風力苦凝嚴 羸臥茅簷病轉添
安得陽春煦大陸 徧將元氣潤芽尖

이 시는 조선 중기 문신 신흠(申欽, 1566~1628)의 <지독한 추위(苦寒)>이다. 여기에는 만물을 얼어붙게 하는 한겨울의 맹추위 속 초가에서 겹친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즉 넓은 대지에 따뜻한 봄기운이 불어와서 그 원기로 새싹을 두루 피어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찌 새싹만 피어나겠는가? 시인의 병도 씻은 듯이 쾌차할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겨울에도 끝은 있어서 시련의 대명사인 강추위도 결국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이 지나가면 찬란한 태양이 뜬다. 불의의 재난을 당한 분들에게도 봄볕 같은 온정의 손길이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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