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의 잔치가 끝나고 복사꽃, 살구꽃, 배꽃은 흔적을 감추었다. 이제 산자락에는 울긋불긋한 철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학교와 주택가의 녹지에는 영산홍과 라일락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 산야에는 각종 활엽수의 연두색 잎들이 새싹을 내밀고 다가올 초여름의 초록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봄빛이 무르익어 각종 꽃이 만발한 시절이 되면 옛 선비들은 뜻 맞는 친구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계절감을 느끼고 삶의 시름을 잊고자 했다.

그대 집에 술이 익으면 비파 소리를 듣고
우리 집에 꽃이 피면 고운 노래를 감상하네.
오가면서 서로 즐기고 마심을 싫어하지 마시라.
해와 달은 던져진 듯 세월을 재촉하고 있으니.

君家酒熟聽琵琶 我屋花開賞艶歌
莫厭往來相樂飮 曦娥如擲促年華
*희아(曦娥): 희화(曦和·羲和)와 항아(姮娥·嫦娥), 해와 달.

이 시는 조선전기 시인 이승소(李承召)의 <영천공자(李定)를 대신하여 성중경(成任)의 시에 화답하다(代永川公子和成重卿詩)>라는 연작시의 하나이다. 친구 집에 술이 익으면 가서 함께 비파 소리를 듣고, 자기 집에 꽃이 피면 친구를 불러 고운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담음으로써 술과 음악, 꽃과 친구가 한데 어우러진 조화로운 상태를 연출하고 있다. 한편 이 시에서는 벗이 서로 오가면서 즐기는 모습을 탓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그 주된 요인으로 탄환처럼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거론하고 있다.

동양에서 오랜 연원을 지닌 술 권하는 노래 <장진주(將進酒)>가 애초에 인간 생명의 유한성에서 오는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제작된 점을 고려하면, 꽃 피는 시절에 벗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삶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류의 민요 가사도 인생의 허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술의 효용은 본디 쾌락과 허무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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