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서(酷暑)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던 것이 엊그제인 듯싶은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풀숲에서 떼 지어 우는 귀뚜라미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가을에는 지난 여름의 더위를 잊고 또 다른 차원의 뜨거운 기운을 즐기는 온천욕이 많은 이를 유혹하게 된다.

현재 부산광역시 도심의 일부가 된 동래의 온정(溫井)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남쪽지방의 대표적 온천이었다. 영천에 거주하던 선비 정백휴(鄭伯休, 1781~1843)가 1833년에 쓴 <남정록(南征錄)>에 따르면, 모두 8칸의 집으로 이루어진 온정은 가운데를 막아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하여 놓고 음양탕(陰陽湯)이라 불렀다. 욕탕은 사객(使客)과 의관지족(衣冠之族)을 위한 양반용(兩班用), 상민들을 위한 잡인용(雜人用), 병든 이들을 위한 악병자용(惡病者用)의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양반이 사용하는 욕조는 석함(石函)이었으나 나머지 것들은 모두 목함(木函)이었다고 한다. 양반과 상민, 병자의 욕탕을 구분하여 운영한 사실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되지만 온정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용이 허용된 곳이었다.

물의 성질은 본디 맑고 서늘한데
어찌하여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가?
대략 소철(蘇鐵) 나무와 같아 보이지만
거슬러 뿜어 나오니 이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네.

水性本淸凉 胡爲湧熱湯
較看蘇鐵木 洄泬理難詳

이 시는 정백휴의 <온정(溫井)>으로 동래온천에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은 다음에 지은 작품이다. 일상의 맑고 서늘한 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온정의 모양새는 소철 나무의 줄기처럼 보이지만 거슬러 뿜어 나오는 이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하여 처음 본 원탕 온정의 모습과 온수가 용출하는 이치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고 있다. 점점 싸늘해지는 환절기에 가까운 온천을 찾아가서 심신의 묵은 찌꺼기를 말끔히 씻음으로써 생활의 활력소를 충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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