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기행의 끝점은 항상 서산의 보원사터가 된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터를 향해 옛길을 따라가는 맛은 쌉싸름하고 은근히 단맛이 난다.

 처음엔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찾아갔다가 덤으로 들르는 곳이다. 그러나 보원사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끄는 곳이 되었다. 절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초등학교 때 소풍 온 것처럼 기분이 한껏 부풀어오른다. 철제 찰주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어 상승감을 더 해 주는 오층석탑을 보기 위해 해마다 보원사터로 향한다. 이제 보원사터 길목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이 기쁨을 주는 보너스가 되었다.

 백제 기행은 아름다움과 묘한 슬픔이 조화되어 사라져간 왕국의 흔적을 더듬는 여행이다. 그러나 보원사터에 들어서면 그러한 비장미보다는 다정함이 훨씬 앞선다. 9m에 이르는 큰 키의 오층석탑은 웅장함과 균제미가 아니라 부드러운 가운데 기품이 있고 안정감이 있다. 섬세한 고려 장인의 솜씨를 보는 듯 하다.

 우리는 영구불변의 돌과 친숙한 민족이다. 돌을 돌 같이 다룬 것이 아니라 혼이 깃들고 불변의 신앙심을 키우는 매개로 여겼기에 수많은 석탑과 석불을 조성했다. 보원사터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석조물들을 보며 옛 사람들의 신앙심과 돌에 대한 친연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절터 입구의 당간지주, 수많은 승려들이 기거했음을 말해주는 커다란 수조, 솟아오르는 형상의 오층탑이 있다. 잘 생긴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도 남아있다. 절터를 가로질러 개울이 있고 그 개울을 건너 탑을 만나러 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며칠동안 내린 비로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어 빙 돌아 민가를 지났다. 고추밭이며 무밭도 지나고 줄기를 쑥 뽑아 올린 토란이 싱싱함도 보았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너른 터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 자리가 오랜 세월에도 변함 없이 부처님의 자리, 진리의 자리임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탑은 물기를 가득 머금었다. 탑 주위로 달개비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었다. 선명한 잉크 빛이다. 아, 이 빛깔은 부처님을 경배하듯 탑을 빙 둘러 파랑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한다.

 풀밭을 걸어가는데 키 큰 탑은 나를 향해 그대로 안겨온다. 절터로 오기 전 서산마애삼존불의 벙긋벙긋한 미소를 보고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고 덕분에 행복한 포만감으로 탑을 보러 온 탓이다.

 이중 기단에 전체적인 모습은 신라 석탑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탑신부에 모두 몸돌을 받치는 굄대가 있는 것 등 고려시대에 석탑의 특징을 충실히 따랐다. 지역적인 특성 때문일까? 옥개석이 얇고 넓은 것이 백제 탑 양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하층 기단에는 사자를 양각하였다. 한 면을 탱주로 3등분하여 각 면에 3마리씩 12마리의 사자가 있다. 표정도 각기 다르고 모습도 다르지만 그저 귀엽다.

 상층 기단은 탱주로 분할된 여덟 면에 팔부중상을 한 구씩 얕게 돋을 새김 하였다. 얕은 조각이지만 물기를 머금어 표정도 살아있고 조각기법을 알아보기에 선명하다. 서쪽의 아수라상은 훨씬 돋보인다. 힘이 장사라는 아수라상은 얼굴이 둥글고 복스럽다. 고려인의 심성을 엿 보는 듯 하다. 눈을 반쯤 감은 건달바는 연주에 열중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악기연주를 하며 풀밭으로 걸어 나올 것 같다. 일층 몸돌에는 사방에 문비를 새겨 부처님의 집임을 알리고 있다.

 라말과 려초에는 탑에 이런 장식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가미된다. 이런 화려한 장엄은 민중에게 경배와 기댐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물기 머금은 탑에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찬란한 아침을 여는 그 시간, 풀들은 깨어 일어나고 꽃은 기지개를 한다. 아침의 생기로 빛나는 탑을 향해 나도 모르게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넓은 절터는 햇빛으로 출렁이고 풀 향기가 바람에 스친다. 12마리의 사자도 불법을 지키려는 듯 꿈틀댄다.

 쇠 찰주가 쭉 뻗어 올라 늘씬한 탑 앞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느끼며 서 있으니 머리는 맑게 개이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폐허 위에 서 있는 탑의 완벽함을 본다.

백제 기행을 나설 때마다 보원사터에 대한 그리움이 확 끼쳐 오는 것은 그곳에 고려 초기에 조성된 우수한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볼거리

서산은 볼거리가 많은 고장이다. 특히 서산마애삼존불은 국보 제48호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애석불 형태의 불상이다. 보원사터를 가려면 반드시 이 곳을 거쳐야한다. 보원사터 2㎞못 미쳐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 입상이 있고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르다 즉 아침, 점심, 저녁때의 미소가 달라진다. 그 미소가 아름다워 ‘백제의 미소’라 불린다. 조각수법이 뛰어난 걸작이다.

충남의 사대 사찰중의 하나인 개심사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다. 마음을 연다는 개심(開心)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절집이다.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절로 백제 의자왕 14년에 창건되어 1000년이 넘는 사찰이다. 돌계단을 올라 절집에 이르는 길 또한 운치가 있다. 봄철의 벚꽃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예산의 추사고택은 가을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김정희 선생의 생가다. 조선시대 아름다운 한옥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사랑채 댓돌 앞에 石年이라 각자 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제작하였다.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를 따라 대전을 지나 천안IC에서 천안 시내로 나온다. 천안 삼거리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아산(온양)을 지나 예산까지 간다. 예산읍을 지나서는 45번 국도로 바꾸어서 삽교를 지나 덕산면(덕산온천)까지 간다. 덕산읍내에서 운산 방향으로 609번 지방도로를 따라 12Km 쯤 가면 왼쪽으로 서산 마애불, 보원사지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마애불까지는 약 1Km, 보원사지까지는 약 3Km 정도된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IC에서 빠져 나오면 운산면이며 이곳에서 서산방면으로 가지 않고 덕산 방면으로 609번 지방도로를 따라오면 고풍저수지를 지나 서산 마애불, 보원사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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