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면 위로 올라가는 마리모에 시선을 고정하며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를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그와의 인연이 홋카이도에서 끝나지 않기를…

냉정해지자. 그는 봉준호가 아니고 나 역시 김은희가 아니다.
쓰레기 냄새와 한데 어우러져 사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동그랗게 웅크린 마리모 위에 그와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일러스트=김윤자
일러스트=김윤자

1.
졸린 눈을 비비며 커튼을 걷는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창가에서 거리를 바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집에 살았다.

반지하인 데에다 창 바로 앞에 커다란 건물이 있어 해를 완전히 가리는 구조였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집은 옆 건물과 널찍이 떨어져 있는 필로티 구조의 빌라인지라 해가 뜨면 커튼이 필요할 정도로 집 안 가득 햇살이 쏟아진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오늘은 내게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특별한 날이 되기를. 오늘이 우리의 기념일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은 조금 낯선, 방 안 가득 들어차는 햇살을 만끽하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마리모로 시선을 이동한다.

마리모를 처음 본 건 홋카이도에서였다. 당시 나는 홋카이도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공부해야 일본어가 더 빨리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홋카이도대에 오기는 했는데, 현지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일본어가 느는 건 아니었다. 애초 계획으로는 주말마다 홋카이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듬뿍 찍어 인스타에 올릴 예정이었지만,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녹음한 교수님의 강의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며 늦게까지 공부하다 보니 주말에는 밀린 과제를 하거나 부족한 잠을 자느라 학교 인근의 관광지조차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세수하러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 속에 비친 충혈된 눈동자와 입가에 난 뾰루지를 보며 이걸 정상적인 20대 여대생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고생하니 졸업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되뇌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 시끄럽던 마음이 조금은 내려앉으면서 그럭저럭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어도 시끄러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데도 취직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부터 그럼 평생 반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라는 걱정에다 서울에서 반지하를 없앤다는데 그럼 나는 고시원으로 가야 하나 하는 불안감까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라 그것들이 한데 뭉쳐서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홋카이도대 국제처에서 유학생 문화 체험 안내 메일을 받은 건 그 무렵이었다. 아칸호수 유람선 탑승을 포함하여 아이누 생활기념관 방문까지 주말 동안 홋카이도의 여러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외국인 유학생 한정으로 참가비가 무료였다. 홀린 듯이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나를 조여오는 우울감이 한창 심해지던 시기였다.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너구나. 한국에서 왔다는 교환학생이.”

배경음악처럼 깔리던 영어와 일본어를 흘려들으며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데 난데없이 익숙한 고국의 언어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하얀 피부에 금테 안경을 쓴 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옆자리 비었니?”

그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그에게서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풍겨왔다. 그의 이름은 이준호이고 일본 문부성 장학 프로그램으로 홋카이도대에서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밟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다니고 있는 대학교의 일문학과 졸업생이라고 했다. 내가 입학했을 적에는 그가 이미 졸업한 이후라 우리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와 갑자기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반쯤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던 싱그러운 바람과 그의 환한 미소가 당시 우리 주위를 맴돌던 햇살과 너무나 잘 어우러져 나는 그가 그대로 그 시간과 공간 속에 그림처럼 박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일본어 능력으로 수업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하던 나와는 달리 일본어와 영어로 다른 좌석에 앉은 외국인 학생들과 농담까지 섞어 가며 유창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아칸호수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주루이섬 마리모 전시 관람센터로 향했다. 건물 내로 들어서자 커다란 수조 안에 담긴 초록색 구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모라 불리는 그 초록 구슬들은 물풀이 뭉쳐진 덩어리로, 호수 바닥에서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굴러다니다 다른 실 형태를 만나면 서로를 감아가면서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성장한다고 그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에이, 그게 뭐예요. 지루하게. 그걸 언제 기다려요? 천천히, 착실하게 말고 그냥 확실하게 빨리 자라는 그런 놈은 없나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져서 나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되돌아가 홋카이도에서는 마리모가 사랑의 전령사로 불리기도 한다면서 마리모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었다.

“옛날에 아칸호수를 거닐던 부족장의 딸과 평민 용사가 만나 사랑에 빠졌거든.”

그러니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기 딸과 평민 용사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족장은 용사를 부족에서 추방했고, 족장의 딸은 그 용사를 따라 집을 나간다. 하늘은 족장의 딸과 용사를 호수 아래로 데려간 후 그들의 사랑이 지극하다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마리모가 된 둘은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위로 떠올랐고 하늘은 약속대로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 주었다.

“그래서 마리모가 떠오를 때 사랑을 이루어 달라고 빌면 하늘이 그 소원을 들어준대.”

“그럼요, 선배. 마리모가 된 족장 딸과 용사는 사랑을 이룬 후 다시 인간이 되나요?”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었다.

“그건 모르겠는데. 그런 부분은 전설에 나오지 않거든. 근데 그게 중요한가.”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게 왜 안 중요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나도 그냥 그처럼 어설프게 웃으면서 수조 안에 가라앉아 있는 마리모에게 시선을 돌렸다. 팔도 다리도 없이 물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초록 구슬들. 사랑이 이루어지는 대가로 평생을 마리모로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랑, 꼭 이루어야 할까. 그런 삶이 행복할까. 마리모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수조 안에서 열심히 기포를 내뿜던 마리모 하나가 둥실 수조 위로 떠 올랐다. 나는 수면 위로 올라가는 마리모에 시선을 고정하며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를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그와의 인연이 홋카이도에서 끝나지 않기를.

 

▲ 일러스트=김윤자
▲ 일러스트=김윤자

체험행사에 다녀온 이후, 그는 내 상상 속에 자주 등장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에도, 기숙사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을 때도 나는 종종 그를 떠올렸다. 아칸호수에서의 만남이 내 정신을 쏙 빼놓아서였을까.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그의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난 그와 다시 만나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시기에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난 그의 학과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캠퍼스 내에서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 일문학과 대학원생들이 주로 수업하는 인문관 건물 주변을 수시로 배회하였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강 시간마다 캠퍼스를 떠돌다 지쳐 대학원 사무실에 찾아갔지만, 행정조교는 핸드폰 번호 같은 학생의 개인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그는 졸업을 몇 달 남겨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다가 그가 졸업할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애태우던 중 한 유학생 친구로부터 중앙도서관 열람실 3층에서 그를 발견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중앙도서관 3층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사람이 많지 않은 열람실 구석 자리에서 검은색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그가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책을 보던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옆자리 비었을까요?”

난데없는 한국어에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선배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아, 하고 기억이 난 듯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올려두었던 자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일본어 전공 서적과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다자이의 책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책장을 넘기다가 모르는 일본어를 물어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잊지 않고 그의 연락처를 받아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에게 수시로 연락했다. 원문을 읽다가 해석이 안 되는 일본어 문장이 나오면 친구에게 물어보는 대신 노트에 적어 두었다가 그에게 물어보았고, 그가 좋아하는 다자이나 야스나리의 작품에 대해 미리 공부한 후 라인으로 그들의 작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가 도와주어서인지 나는 일본어 과제를 전보다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고, 일본어도 예전보다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주말에도 여유가 생겨서 기숙사 방에 처박혀 과제에 전념하는 대신 그와 함께 홋카이도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었던 오타루에서는 그와 함께 오르골당에 들러 맑고 투박한 오르골 소리를 감상하기도 했다. 오르골당 3층에서는 오르골에 들어갈 인형 장식과 음악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는 진열된 오르골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소년과 소녀가 두 손을 맞잡은 채 마주 보고 서 있는 장식과 함께 세카이노 오와리의 ‘일루미네이션’을 골랐다. 나는 똑같이 생긴 두 마리의 강아지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손을 잡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장식이랑 그린의 ‘키세키’를 집어 들었다. 그와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이 내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어둠 속에서 별빛과 불빛을 한데 품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오타루 운하 옆을 걸으면서 그는 나에게 일본어 문장 하나를 읊어주었다.

“하지노 오오이 쇼오가이오 오쿳테키마시타(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그러고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다자이를 좋아해서 일문학을 선택했고 일본에 오긴 했지만, 사실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은 후 친구와 같이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결과가 영 좋지 않았다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화를 말아먹은 후 친구는 도쿄로 건너와 영화제작을 배우고 있어. 걔네 아버지 친구분 중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 있다나 봐.”

그는 친구를 따라 도쿄로 가서 같이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도쿄에 있는 대학교는 경쟁률이 높아서 장학금을 받고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집에서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들었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아둔 돈은 영화를 만들면서 바닥이 난 상태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일본 대학교를 찾다 보니 홋카이도에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웃기지, 애초에 유학 계획을 세웠던 이유가 그 친구 옆에서 영화를 배우려고 그랬던 건데 도쿄는 자신이 없어서 지원도 못 하고, 결국 홋카이도라니……. 가끔 내가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는 걸음을 멈추고 운하에 흐르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는데 물속에서 반짝이는 가스등의 불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위에서 반짝이던 작은 별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던 부드러운 바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순간 어색한 미소를 흘리던 그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고 그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나 역시 한때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나의 재능으로는 스타 작가는 고사하고 지상에서 번듯한 집을 구할 정도의 대우를 받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포기하긴 했지만. 서로의 꿈과 현실의 높은 벽, 그것을 깨기 위해 시도하다 깨친 한계와 좌절, 상처를 서로 털어놓으며 나는 그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한없이 상냥했지만 그건 그 외딴섬에 한정된 추억일 뿐이었다. 그의 핸드폰 번호는 홋카이도에서 개통한 현지 통신업체의 번호였기에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없어질 번호였다. 그가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도 홋카이도대 계정이니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동 반납되어 사라질 주소였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나는 그와 카페에서 샷 추가한 아이스라테를 마시면서 그의 한국 연락처를 물어봐도 될지 고민했다. 마지막 얼음 한 조각을 넘기는 순간까지 갈등했지만, 그가 혹시 나를 스토커처럼 여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그림자처럼 옅게 깔려서 나는 결국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선배, 우리 한국에서 또 볼 수 있을까요? 한국 가서 선배 보고 싶으면 어떻게 연락해요, 라며 그에게 질척거리는 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정도 달라붙으면 그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는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라고 말했을 뿐,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에게 한국 핸드폰 번호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한국에서 나와의 개인적인 연락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

하지만 운명은 때때로 인간의 의지 따위는 가볍게 넘어서기도 한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본교로 돌아오니 4학년이 코앞이었다. 그건 곧 수십 장, 아니 어쩌면 백 장이 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하는 학년이 닥쳐왔음을 의미했다. 나는 본격적인 구직활동에 뛰어들기 위해 학생회관 2층에 자리 잡은 교내 취업정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우리 학교 취업지원관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상시보다 반 톤 높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방방 뛰는 나를 당황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칸호수와 홋카이도대를 말한 이후에야 기억난 듯, 오랜만이에요, 라고 어색한 존대어로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우리의 재회를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 믿었다. 그는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라고 말했을 뿐 연락처를 준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이게 운명의 힘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운명이 이 정도로 기회를 주었다면 나머지는 내가 할 몫이었다. 나는 그가 하는 취업특강에 모두 참석했다. 그리고 취업 상담을 신청할 적마다 상담관으로 그를 지목했다. 상담은 학기 중 월 2회까지 가능했기에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나는 취업정보실 근로 조교직을 신청했다.

내 자리는 그의 옆이었다. 학생들이 취업정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문 바로 앞에 내 책상이 있고 오른편에 그의 자리가 있었다. 나와 그의 자리 사이에 칸막이가 있긴 했지만, 의자를 약간만 뒤로 젖히면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의 뒤통수와 자질구레한 서류가 쌓여 있는 그의 책상을 볼 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그의 모니터 옆에는 하얀색 돌멩이와 초록색 마리모가 들어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분주하게 자료를 정리하다가도 가끔 유리병 안 마리모를 보면서 소설 속 일본어 문장을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일본에서 소설을 읊어주던 장면, 그러니까 별이 부서지던 오타루 운하라든지, 우리를 편안하게 감싸며 흘러가던 부드러운 바람이라든지,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 같은 것이 떠올라 살며시 미소를 머금곤 했다.

그즈음이었다. 내 방 책상 위에 마리모를 올려두었던 시기가.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가 애완동식물 코너에서 수조 안에서 기포를 내뿜는 초록색 덩어리들을 보았다. 추억에 잠겨 수조 안에 담겨 있는 마리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기포를 내뿜던 녹색 구슬 하나가 둥실 물 위로 떠 올랐다. 그 순간 아칸호수 박물관에서 마리모를 보며 소원을 빌던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수면 위로 올라가는 마리모를 보며 소원을 빌었다. 그가 나를 돌아봐 주길. 그가 나에게 말을 편하게 하길. 예전 홋카이도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주변에 분명하게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너무 분명해서 마치 그 선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사무실 안에서 아무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학생들에게 처음에는 경어를 쓰다가도 어느 정도 얼굴이 익고 친해지면 말을 놓기 마련이었는데 그는 학생들이 말을 편하게 하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절대로 말을 짧게 하지 않았다. 나처럼 근로 조교로 일했던 미진은 그런 그에게 오기가 생겼는지 그에게 말을 놓으라고 수시로 졸라대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느 날인가 사무실에 찾아왔던 미진이 그에게, 샘이 자꾸 경어를 쓰니까 우리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잖아요, 라며 서운함을 토로하다 돌아가자, 그는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상담실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로 걸어가 앉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가까워지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러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시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컴퓨터 모니터를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만 그가 내뱉은 문장은 마음 한구석에 그대로 저장되었고 그가 미진을 좋아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나에게도 꼬박꼬박 존대어를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했다.

홋카이도에서는 그가 나에게 단 한 번도 존대어를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 마리모에 대해 알려주던 그와 한국에 돌아와 취업정보실에서 일하는 그는 쌍둥이처럼 겉모습은 똑같았지만, 서로 완벽하게 다른 인격체 같았다.

3.

나는 그가 강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단상 위로 올라가 자리에 앉은 학생들을 훑어보더니 포인터를 들고 스크린에 띄워진 PPT 슬라이드를 앞뒤로 넘겨본다.

연단 앞에 고정된 마이크를 뽑아 들고 마이크 헤드를 가볍게 두드린 후 뒤쪽을 쳐다보며 한 손을 들어 올린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빛이 한층 더 또렷해진다. 그가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대기 중에 울려 퍼진다. 머리를 처박고 스마트폰에 집중하던 백여 명의 뒤통수가 한 번에 들어 올려진다. 마치 매스게임이라도 보는 듯하다. 그가 첫 번째 슬라이드를 펼친다. 그의 프로필이 슬라이드 한 장에 모두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빽빽하게 기재되어 있다.

“저는 우리 학교 취업지원관인 이준호입니다. 슬라이드에서처럼 이런저런 경력들이 있습니다. 너무 자세히 보지는 마세요. 자기 자랑 같아 민망하네요. 시간 관계상 제 소개는 이쯤 하고 넘어갈게요.”

학생들이 핸드폰을 들어 스크린 화면을 찰칵찰칵 찍는다. 슬라이드에는 그의 학력과 그가 근무했던 회사명, 담당했던 프로젝트명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학생들이 오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가 자기소개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신뢰감을 장착한 천진한 눈망울들이 그에게 쏟아진다. 그는 30초도 되기 전에 서둘러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간다.

학생들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슬라이드를 봐주세요. 뭐라고 쓰여 있죠? 네, 맞아요. STAR. 무슨 뜻이죠? 하늘에 있는 그 STAR 말고요, 자소서 작성할 때 STAR 기법에 맞춰서 작성해라 이런 얘기 들은 적 있죠?”

그의 단단한 음성이 강의실을 가득 채운다. 나는 그의 동그스름한 콧방울을, 살짝 튀어나온 입술을, 안경 너머 반짝이는 진갈색 눈동자를 바라본다. 방금 그와 눈이 마주친 듯도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 나는 어둑한 강의실 뒤편에 앉아 있으니, 그가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하는 취업특강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물론 그의 모습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가 하는 특강은 실제로 취업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를 취업정보실 꽃미남 일타강사라고 불렀고 모두 그를 좋아했다. 당시 그는 학생들에게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같은 존재였고 난 그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채 그 별을 바라보는 평범한 생물체에 불과했다. 가슴이 저릿해지고 심장이 아프도록 그를 갖고 싶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앞에만 서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졌고 그에게 다가서기에 나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는 졸업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월급을 받아 요즘 유행하는 옷과 가방을 샀다. 대출을 받아 오랫동안 꿈꾸던 지상으로 이사도 했다. 대기업에 취직하니까 데면데면했던 후배들이 먼저 다가와 살갑게 인사하기도 했고 동기와 선배들도 부럽다며 같이 밥이나 먹자고 먼저 청해 주었다. 세상은 대기업 직원에게 따스하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러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핸드폰에 카톡 알림음이 울린다.

- 언니

- 오늘 송별회 온다면서요?

- 학교 왔어요?

- 나 학교

- 어디예요?

- 나 보러 온 거 맞죠?

그리고 웃는 이모티콘까지. 카톡 7개가 연달아 들어온다. 미진이다. 함께 조교로 근무했던. 학교에 왔다고. 취업특강 때문에 학생회관에 있다고 답을 보내자, 만나서 얘기하자고, 학생회관 1층 카페로 오라는 톡이 연이어 온다. 거기서 얘기나 나누다가 송별회 장소로 같이 이동하자고 한다. 취업특강이 끝나면 근로 조교 송별회가 예정되어 있다. 난 지난 학기에 조교직을 그만두고 학교를 졸업했지만, 얼마 전 취업정보실에서 연락이 와서, 시간이 되면 졸업한 선배로서 송별회에 와서 후배들에게 좋은 얘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 사직하는 조교들 대다수가 지난 학기에 나랑 같이 근무했던 조교들이고 근로 조교 관리는 그의 업무 중 하나이니 그 역시 오늘 송별회에 참석할 것이다. 좋은 곳에 취직하여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송별회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도 아마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에게 고백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으리라.

건물 1층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미진이 앉아 있는 자리 맞은 편에 앉는다.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에 높이 솟은 코, 손을 대면 쓱 미끄러질 듯한 피부. 미진은 여전히 예쁘다. 미진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미진은 커피를 마시면서 학과 소식을 비롯해 동기들 이야기나 취업정보실 근황을 실타래처럼 꺼내 놓는다. 나는 그녀가 들려주는 선후배나 학과 소식보다 취업정보실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그곳은 그가 일하는 장소니까. 미진은 이번에 신설되는 취업 프로그램 이야기를 늘어놓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팔을 툭 친다.

“근데, 언니. 그 얘기 들었어요? 준호 샘 이번에 학교 그만둔대요. 이번에 우리랑 송별회 같이하는 거래요. 재계약 안 한다는데?”

머리끝이 곤두선다. 뭐라고? 재계약? 나는 고개를 돌려 미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재계약? 무슨 말이야, 준호샘이 왜 계약직이야? 너 샘 프로필 못 봤어? 경력이 얼마나 화려한데…….”

미진이 피식 웃는다.

“언니, 근무 기간은 안 봐요?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회사를 거쳤다면 거기서 얼마나 짧게 머물렀을지 예상 안 돼요?”

무언가 둔중한 물건으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그렇다. 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오래 머물렀다면 경력은 한 줄이면 족할 테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프로필이 담긴 슬라이드를 재빨리 넘기면서 얼버무리던 그가 떠오른다. 그는 겸손한 게 아니라 숨기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 그 프로필의 약점을 알아볼까 봐. 돌이켜보니 그가 적은 프로필에는 그가 재직했던 회사명과 담당했던 프로젝트명만 나열되어 있을 뿐 활동기간은 나와 있지 않았다. 머릿속이 빙글 돌더니 큐브를 맞출 때처럼 그동안 그의 행동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그가 왜 동료 직원이나 교수나 학생들을 향해 기계적인 미소를 짓곤 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의 목에 항상 싸구려 광이 번들거리는 넥타이만 걸려 있던 까닭도. 사무실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특강자료까지 떠맡으면서도 제대로 된 불만 하나 토로하지 못했던 이유도.

“영화 일 하고 싶대요. 친구가 일본에서 영화 찍고 있어서 그쪽으로 간다던데요? 웃겨, 정말. 그 나이에 친구 밑에서 보조 뛰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봐요. 친구는 그 나이에 벌써 감독인데. 주제를 알아야지.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완전 현실 감각 제로라니까요.”

“그 친구는 감독이래?”

“집에서 지원을 해주나 봐요. 업계에 아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래도 영화가 돈 많이 들잖아요. 돈도 없고 인맥도 없이 어느 세월에 투자자 모아서 영화 찍고 하겠어요? 그거 한 편 찍는 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면서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 심장에 아프게 박혀 온다. 알고 있다. 그에게 영화가 꿈이라는 것을. 언젠가 별빛이 쏟아지던 운하 옆에서 자신의 꿈을 고백하며 미소 짓던 그를 보며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응원했던 그 시간이 꿈결처럼 아득했다. 물론 꿈이야 꿀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존을 위해서는 꿈보다 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그의 꿈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가 꿈을 이루기를 응원한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런 안전망도 없이 그가 날아오르기를 고집한다 해도 그와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는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잠깐 가 봐야 할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미진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이제 곧 송별회 시작하는데……. 준호 샘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요. 언니, 그 샘 좋아했잖아요.”

“어떻게 알았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미진이 그를 좋아하는 걸 알았기에 미진 앞에서는 그를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에이, 언니. 그게 숨긴다고 숨겨져요? 언니가 준호 샘 좋아한 거 우리 팀 전체가 다 알아요. 준호샘도 아마 알고 있을걸요?”

그럴까. 그도 알고 있을까.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선을 그어댔던 것일까. 그렇다. 그를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나의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언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정리하고 다시 와요. 이번 송별회에 언니 부르자고 한 거 준호샘이예요. 샘도 언니에게 무슨 할 말 있는 것 같던데…….”

나는 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돌아올 텐데 혹시 내가 오지 않거든 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 부탁하고 카페 문을 나선다.

4.

집으로 가다 보니 예전에 살던 집으로 이어진 골목길이 눈에 들어온다. 저 골목 끝부분에 자리 잡은 원룸식 건물 지하에서 불과 지난주까지 살았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특유의 눅진한 곰팡내가 봄철 꽃가루처럼 온몸에 내려앉는 곳. 창을 열어젖히면 시큼한 냄새가 옅은 안개처럼 집 안으로 기어들어 오던 곳. 안에서 풍기는 곰팡내와 밖에서 들어오는 쓰레기 냄새 중 무엇이 더 견딜만한지 고민하던 곳.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제 그 공간은 내게 속한 곳이 아니다.

나는 지상에 있는, 지난주에 이사한 새집으로 간다. 문을 열자, 햇빛이 커다란 통창을 통해 거실 가득 들어오고 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는다. 책상 옆에 붙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책상 위에 햇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따뜻한 사각형의 한쪽 끄트머리에는 마리모가 담긴 병이 있다. 동그랗고 조그마한 초록색 털 뭉치. 난 마리모를 한참 동안 쳐다본다. 마리모가 되어 사랑을 이룬 족장의 딸은 행복했을까. 사랑 없이 살더라도 마리모보다는 족장 딸로 사는 게 더 나은 삶이 아니었을까. 아닌가. 마리모로 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더 행복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마리모를 보며 말을 걸었지만, 그 동그란 녀석은 최선을 다해 몸을 웅크릴 뿐 내 질문에 아무런 답이 없다.

나는 마리모가 담긴 병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움직임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이 마치 초록색의 동그란 무생물 같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다시 보니 마리모 주변으로 조그마한 기포가 쉴 새 없이 생성되고 있다. 마리모는 나름대로 열심히 숨을 쉬는 중이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살아남기 위해.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저렇게 열심히 숨을 쉬다 보면 언젠가는 둥실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걸까. 그의 사랑스러운 음성을, 다정한 미소를, 따스한 눈동자를 잊을 수 있을까. 그는 성장할 것이다. 마리모처럼.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갖춰가면서. 그리고 떠오를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쉬지 않고 계속해서 기포를 만들어 내면서. 그를 응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마리모에게 힘을 얻었고 그것을 좋아하지만, 마리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와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접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이성이 내게 속삭인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모든 걸 끝낼 수 있을까. 멍하니 마리모를 바라보는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울린다.

- 학교 왔었다며? 우리 지금 송별회장으로 이동 중. 많이 바빠? 늦더라도 꼭 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기다릴게.

그가 보낸 문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반복해서 눈으로도 읽어 보고 소리 내어 발음도 해 본다. 문자로든 실제 대화로든 이 나라에서 그가 나에게 친근한 반말을 건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 든다. 그는 도쿄에서 영화를 만들고 나는 그의 옆에서 글을 쓰는 생활을 상상해 본다. 어쩌면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그는 그것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하거나. 하지만 그런 생활과 쏟아지는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을 모두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냉정해지자. 그는 봉준호가 아니고 나 역시 김은희가 아니다. 대기 중에 무수하게 떠다니는 곰팡이 포자들과 내가 버리지 않은 쓰레기 냄새와 한데 어우러져 사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서 나의 사랑을 고집할 수 있을까. 고집할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놓아야 할까. 나는 병 안의 마리모를 응시한다. 마리모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동그랗게 웅크린 마리모 위에 그와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는 마리모가 담긴 유리병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좌변기 뚜껑을 열고 그 위에 유리병을 가만히 기울인다. 유리병에 담겼던 물과 함께 변기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던 마리모가 바닥에 닿기 직전 빙그르르 돌더니 물 위로 조금씩 떠 오르기 시작한다.

마리모가 물 위로 완전히 떠 올랐을 때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끝)

 

▲ 오승경
▲ 오승경

오승경 당선소감 / 고향서 등단 소식 기뻐…무해한 글 오래 쓸 것

한동안 병원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반신마비로 왼쪽 손가락을 쓰지 못해 자판을 치지 못하면서 소설을 더는 쓰지 못하는 걸까 우울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오른손은 움직임에 전혀 문제가 없고 글이야 펜으로 쓰면 그만이니 왼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게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트를 펴고 오른손으로 펜을 들어 글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다년간의 재활을 통해 지금은 일상에 무리가 없을 만큼 왼쪽 손가락도 움직이고, 평균보다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자판도 그럭저럭 치고 있습니다.

소설작법을 정식으로 배워 보는 게 어떻겠냐고 등을 밀어주셨던 이순원 작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소설의 기본기를 알려주신 박상우·문지혁·강영숙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가장 먼저 읽어주고 정성껏 평을 해 주는 은재와 필이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저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남편과 진이에게도 사랑과 감사를 담뿍 담아 보냅니다.

그립던 고향에서 등단 소식을 듣게 되어 더 기쁘고 감사합니다.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과 경상일보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해한 글을 오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울산 출생, 서울 거주.
-경희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한국외대 TESOL학과 박사과정 중퇴.

권지에 심사평 / 절망 속에서 희망을 속삭이는 서사 돋보여

▲ 권지예
▲ 권지예

예심을 거쳐 본심작으로 올라온 작품은 10편이었다. 젊은 세대의 가난과 취업난 등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서사와 법의관, 성형외과 의사, 교도관, 우주 탐사원 같은 전문 직업군의 다양한 스토리가 흥미를 끌었다.

‘빈방’은 교도관과 여성 장기사형수와의 오랜 믿음과 우정 또는 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스토리지만, 후반부에 사형수의 너무도 긴 편지글을 배치한 게 플롯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프로바 모르템’. ‘죽음을 입증하라’는 뜻의 제목을 단 이 단편은 성실한 법의관이 현장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모습과 사연을 나무랄 데 없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작품 곳곳에 진지한 삶의 통찰이 엿보여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나 주변의 에피소드보다 주인공의 사연을 좀 더 핍진하게 밀고 나갔으면 더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젊은 세대의 취업난과 직장에서의 고난을 그린 작품으로 ‘작은 빛’과 ‘마리모’, 두 단편을 주목했다. ‘작은 빛’은 백화점 안내데스크의 계약직 여주인공의 애환과 백화점 개점 2주년 기념행사에서 인간성을 잃고 로봇처럼 소모되는 인물 군상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려 인상적이었다. 특히 유리 케이지에 전시된 쌍코피를 흘리는 불쌍한 아기호랑이를 들고 탈주하는 동료 최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여주인공은 잠깐 거기서 ‘낯선’ 작은 빛을 느낀다. 희망은 없고 현실에 매몰된 젊은이의 초상이다.

‘마리모’는 비슷한 현실 속의 가난한 젊은 주인공들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그린다. 짧은 계약직과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미래는 어둡고, 사랑과 결혼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그래도 꿈을 포기하는 자와 꿈을 쫓는자가 있다. 선배를 사랑하는 여주인공의 심리묘사와 현실적인 고민과 사고가 공감을 이끌어낸다. 선배의 꿈을 응원은 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는 딜레마.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속삭이는 그 서사의 실을 미묘하게 엮어내는데, 마리모와 마리모의 전설을 전략적인 문학 장치로 잘 쓴 수작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드리며 역작을 응모한 분들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약력
-소설집 <퍼즐> <꽃게무덤>
<베로니카의 눈물>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 <4월의 물고 기> 등 출간.
- 이상문학상·동인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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