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변화로 차례가 간소해지고
명절쇠는 풍속도 제각각이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情은 한결같길

▲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

대추 밤을 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 ‘장날’

이제 1주일 후면 추석(秋夕)이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처서(處暑)’ 때만 해도 그 기세등등하던, 역대 최장기를 기록한 열대야도 서늘한 가을 저녁으로 바뀌었다.

필자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추석이 오면, 유학(?)하던 대처에서 동차(動車)에 몸을 싣고 중간 환승역인 김천에서 내려 경북선 완행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저녁쯤 고향에 도착하면 부모님께서 기르던 가을누에가 성충이 되어 고치를 만들 때였는데, 고달픈 귀향길이었지만 마음은 늘 설렜다.

그 때 연중행사로, 집안의 며느리들과 시집가지 않은 고모들은 잘게 부순 기와 가루를 짚에 묻혀 엄청난 양의 놋그릇을 닦았다. 추석 전날이 되면 안방에서는 여자들이 오순도순 송편을 빚거나 전을 부치고, 사랑에서는 남자들이 모여 밤을 쳤다. 어머니는 맨드라미 꽃과 검은깨를 고명으로 올려 증편(烝-)도 만드셨다. 송편을 찔 때 넣으려고 부드러운 소나무를 두어 가지 꺾어 오시곤 했는데 이때 먹는 떡을 ‘오려송편’이라 하여 추석 근처에 수확하는 ‘올벼’로 만든다.

그런데 왜 ‘송편을 빚는다’ 하고 ‘밤을 친다’고 했을까?

아마 장인이 ‘도자기나 술을 빚’듯이 온 정성을 다해 송편을 만들라는 뜻이리라. 밤은 겉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속 껍질 ‘보늬’도 다시 제거해야 한다. 제기(祭器)에 겹겹이 얹을 수 있도록 아래위를 평평하게 깎은 후 변두리 부분을 돌리면서 모양을 내는데, 음악가가 ‘북이나 장구를 치’듯이 악기를 다루는 마음으로 준비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필자의 고향에서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 중 하나는 먹을수록 입에 당기는 시원한 배추전이다. 요즘은 많은 가정에서 전을 부치기가 번거로워 전(煎) 전문점에서 예약 구매해 쓰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만들기에 번거롭고 긴 시간이 필요한 만큼 떡 만드는 방앗간도 많이 생겼고, 재래시장에 가면 밤을 깎아 파는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으니 집에서 애써 밤을 치는 모습도 보기 힘들어졌다.

주지하다시피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인간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통과의례인데, 그 중 제례는 기제사와 차례로 나뉘고 추석과 설은 ‘차례’에 속한다.

필자가 어릴 적에는 대소가(大小家) 어른들이 의관(衣冠)을 갖추고, 제사상에 제수를 차리는 ‘진설(陳設)’부터 상을 치우는 ‘철상(撤床)’까지 엄격한 예법으로 조상을 모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당시에는 형식적이지만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상 차리는 순서나 차례 지내는 절차 등을 매우 중요시한 기억이 난다.

차례가 끝나면 제(祭)꾼들이 둘러앉아 음복(飮福)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 어른들의 말씀이 바로 자연스러운 책상머리 교육의 하나였다. 요즘은 시대의 변화로 차례가 많이 간소해지기도 했지만, 많은 가정에서 추석 연휴를 맞아 가족 여행을 떠나는 것도 새로운 풍속이 되었다.

옛날만큼 설렘이 없는 추석이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대가족이 모여 밤을 치고 송편을 빚으며 화목을 다지던 그 옛날 미풍양속은 멀지 않아 사라지거나 박물관에 포자처럼 남아 그 명맥만 유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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