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음악의 거장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매우 열정적인 삶을 산 음악가였다. 그의 인생은 매우 다양하고 화려했으며 그만큼 많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피아노 연주로 널리 알려진 리스트는 쇼팽보다 1년 늦은 1811년에 헝가리의 라이딩(Raiding)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공개 독주회를 열어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많은 후원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19세 때에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결국 '초절기교 연습곡' 같은 아찔한 초고난도의 기교를 요하는 곡을 만들어서 유럽을 순회하면서 연주를 했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에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신비감을 피아노에서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심지어는 얼굴 표정까지 파가니니의 흉내를 냈다고 한다. 당시 청중들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연주가를 기대하고 좋아했었다. 잘생긴 외모에 화술이 능한데다 음악적인 재능까지 있었던 리스트는 어딜 가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다. 또한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만도 하다.

리스트가 16세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들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세상을 떠나며 리스트에게 "얘야, 너는 여자 때문에 걱정이구나. 평생 여자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지배를 당할 테니 말이다"라는 유언까지 했다고 한다. 리스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당시의 신문 만평에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리스트 주변을 에워싸고 달려드는 듯한 여자들의 모습이 자주 실렸다고 한다.

리스트는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건반악기 주자들이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하던 것을 옆 벽면을 향하는 오늘날의 위치로 앉아서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또한 오랜 외국에서의 활동 중 고국인 부다페스트로 돌아갈 때에는 마치 개선 장군 같은 환영을 받았다. 늘 대만원이었던 연주회의 수익금을 전부 자선사업에 기부했던 그는 명예시민으로 추대됨과 동시에 헝가리의 영웅이 되었고 그가 머문 호텔에는 수천명의 횃불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연주자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리스트는 커다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주를 듣는 태도가 좋지 않을 때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러시아의 니콜라우스 황제 앞에서 연주를 한 적이 있었다. 연주 도중에 황제가 부관에게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자 리스트는 갑자기 피아노에서 손을 뗐다. 그것을 본 황제가 깜짝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폐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누구나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고도로 기교적인 새로운 방법을 개발시킨 리스트는 당시 앞을 내다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곡가의 작품까지도 편곡, 자신의 감각적인 테크닉을 첨가해 전파시킴으로써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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