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태양, 숨막히는 공기…. 어디 비상 탈출구가 없을까. 에어컨, 선풍기 모두 끄고 일단 집으로부터 탈출하자. 그리고 녹음이 하늘을 가린 계곡 속으로 잠행해 보자.

8월 염천에 뜬 태양이 무섭지 않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일단은 뜨거운 태양에 '맞짱'을 한번 떠본 뒤 계곡으로 숨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봉산~쇠점골~호박소'구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봉우리를 하나 넘고, 그 다음 깊디깊은 계곡으로 흔적도 없이 침잠하는 코스.

석남사에서 석남터널 방면으로 구비구비 올라가다 첫 휴게소에 30여m 못미쳐 있는 왼쪽 소공원에서 산행은 시작된다. 올려다 보면 아무것도 없지만 곧 나타날 기암괴석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폭염, 불어오는 바람이 후끈후끈 하다. 그러나 숨가쁜 호흡에 그보다 더 뜨거워진 몸은 오히려 그 바람이 시원하다.

울밀선 도로를 벗어나 가파른 오르막을 30여분 오르고 나면 마침내 산천 경계가 한 눈에 들어오는 가지산~능동산 능선에 우뚝 서게 된다. 누가 이런 곳에 이런 아기자기 한 능선이 있을 줄 알았으랴. 이름은 고봉산, '작은 칼바위'라 이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줄지어 선 바위를 끼고 돌며, 때로는 발 아래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 보며 20여분. 거대한 2개의 바위가 쌍을 이뤄 우뚝 선 이른바 '당간지주'바위에 도달한다.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2개의 받침대를 말한다.

'당간지주' 바위를 지나면 또다른 전망대 바위가 나오고 그 바위를 지나면 이제부터 고봉산 정상을 향한 오름길이다.

고봉산 정상에는 별다른 게 없다. 그렇지만 영남알프스 최고의 계곡 '쇠점골'로 내려가는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정상에 선 등산객들은 또 다른 기대에 부푼다.

하산길 20여분. 마침내 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계곡에서 올라오는 공기에도 습기가 느껴진다. 숲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무렵, 드디어 두 발은 계곡의 암반에 안착하고, 열하의 오후 계곡 속으로 침잠한다.

쇠점골의 최상류는 물이 많지는 않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비경은 계속 나타난다. 전날 비라도 좀 왔다면 쇠점골은 등산객들에게 신선이 부럽지 않을 만큼 좋은 풍광을 선물한다. 지난해 태풍 때문에 면적이 많이 줄었지만 '오천평 반석'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산꾼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 이 밖에도 많다.

계곡은 길고, 물은 갈수록 많아진다. 소와 폭포도 점점 커진다. 마음이 내킨다면 아무 곳에서나 베낭을 벗고 풍덩 물에 잠겨도 좋다. 편안하고 길게 누운 쇠점골은 속세를 떠난 등산객들에게 깊은 안식을 준다.

쇠점골을 타고 계속 내려가면 오른쪽에서 내려오는 또다른 계곡과 만난다. 이 쯤에는 이미 피서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텐트촌을 형성하고 있어 속세나 마찬가지다.

오른쪽 계곡으로 방향을 바꿔 거꾸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호박소다. 방향을 바꾸지 않고 계속 내려가면 얼음골로 이어진다. 나가는 길은 둘 중 어느 방향이든 괜찮다.

호박소는 이무기가 글을 읽고 용이 됐으나 승천하지 못하고 이 곳에 잠겼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절구의 일종인 호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박소'라 불리고 있다.

옛날 근처 사람들이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돌을 매단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보았지만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영남알프스의 준령 고봉산 정상에서 명주실 한 타래도 닿지 않았다는 호박소까지, 쇠점골은 이렇게 가장 높은 하늘과 가장 낮은 물속까지 등산객들을 실어 날라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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